세종특별자치시 보훈단체협의회 발전 위한 초석 다져

박행남 세종특별자치시 보훈단체협의회 회장
박행남 세종특별자치시 보훈단체협의회 회장

 

박행남 회장, 국가유공자로서 보훈단체의 산증인으로 국가관 투철

 

세종특별자치시의 출범은 2012년이지만 현재까지 11년이란 시간은 아직 지역 내 보훈단체와 시민사회가 깊이 뿌리내리기에는 다소 부족한 연한으로 보인다. 기존에 있던 보훈단체와 시민사회가 재편되면서 조직이 자리 잡기 불충분한 시간으로 인해 이제 막 각 단체와 시민들이 세종특별자치시 내부의 본격적인 서막을 여는 중이다.

세종특별자치시 보훈단체협의회장 겸 대한민국상이군경회 세종특별자치시지부장 박행남 지부장은 현재 1읍9면14동으로 구성된 세종시의 행정구역에 따라 조직된 보훈단체를 이끌며 “세종시 특성상 구(區)단위 행정구역이 없어 지회가 설립되어 있지 않은데 지부만 설립된 상태에서 지회가 갖춰진 타 시군과의 차이로 형평성에 약간의 어려움이 생길 때가 있습니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물론, 이러한 어려움은 작은 범주에 속하며 세종시 보훈단체도 전국의 여타 보훈단체들과 마찬가지로 현실적인 문제에 당면해 있고 이를 해결하기 위해 분주하다.

 

대한민국상이군경회에 경찰 유공자도 많다는 사실에 집중할 수 있었다.

총칼 앞에 스러져도 투철한 애국심과 강한 용기로 우리 삶을 이룩하는 데 헌신한 대한민국상이군경회 세종특별자치시회의 현재 회원은 800여 명에 달한다. 세종시는 아직 출범 초기로 볼 수 있어 도시 규모가 크지 않은 데 비해 회원 수는 많은 편이다.

회원 구성은 대한민국상이군경회 세종특별자치시의 경우 타 시군과 마찬가지로 6.25 유공자와 월남참전 유공자 그리고 경찰 출신들이 포함되어 있다.

박행남 지부장에 따르면 6.25 당시 징집된 군인들의 목숨 건 헌신이 부각되는만큼 경찰로서 싸운 유공자도 많아 부산에서 첫 출발한 상이군인회가 경찰과 합해 현 대한민국상이군경회의 모태가 되었다는 것이다.

자유국가수호와 시민보호 그리고 국가위기의 순간을 국가와 민족을 위한 사명감으로 무장한 채 슬기와 인내, 용기로 극복해 온 국가유공자는 순국한 군인 못지않게 활약한 순국 경찰들을 함께 기려 대한민국상이군경회로서 현재까지 이어져 왔고 과거의 호국 정신을 여전히 간직해 지금도 국가와 국민을 위해 싸우다 다친 부상자들은 대한민국상이군경회의 일원이 된다.

한편, 대한민국상이군경회에는 6.25 참전용사, 월남파병군인, 상이 경찰이 포함되는데 6.25 당시 설립되었다가 세월을 거치며 현재의 모습으로 자리 잡았다. 특히, 6.25때의 상황으로 부상 당하고 사망한 경찰도 많아 그중에는 조치원에 살고 있는 4~5명의 유공자도 있으며 현재 회원으로 가입되어 있다. 박행남 지부장의 지인이며 당시 경찰이었던 김현창이라는 분도 이에 대해 증언하고 있었다.

 

월남 파병 중 부상 입고 현 세종시 보훈단체를 이끌게 되다

박행남 대한민국상이군경회 세종특별자치시지부장 겸 세종시특별자치시 보훈단체협의회장은 대전시청 공무원으로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대전에서 지내던 중 1967년 백마부대 소속으로 월남전에 참전했다가 부상 당해 이듬해인 1968년 제대하였다.

다른 유공자들과는 달리 고엽제 피해는 입지 않았으나 부상 정도가 심해 다른 부상병들과 함께 미군 수송기로 이송되어 왔다고 한다. 부상병들을 실은 미군 수송기는 필리핀을 거쳐 박행남 지부장과 부상병들을 국내로 이송해 왔다.

대한민국상이군경회는 전투 중 부상의 종류에 따라 전상과 공상으로 구분하는데 박행남 지부장은 전상에 해당한다. 적과의 전투 중 입은 부상을 칭하는 말로, 전투 외에 훈련이나 여타 공무로 인한 부상은 공상으로 분류한다.

박행남 지부장은 전상 판정 이후에도 사회에 복귀해 포항제철에서 일하기도 했고 여러 직업을 거쳐 지금에 이르렀다. 그에 따르면, “대전시청 공무원으로 출발한 만큼 포항제철도 사기업이 아닌 이유로 공적인 일을 했다고 생각하며 이후 다른 직업들 역시 말단직을 맡았지만 최선을 다해 일했습니다.”라고 한다.

 

세종시 보훈단체에서 일하게 된 계기

대한민국 상이군경회에 몸담게 된 시작은 1970년 연기군지회 사무장으로 일하게 되면서부터다.

“그때는 상이군경회의 조직이 상세하게 조직되어 있지 않았고 세종시 출범 전이라 정확히 어느 지역이라고 하기는 힘들지만 대전과 공주 지역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대체로 현 세종시 일대인 충남 공주, 대전 지역 상이군경회에서 일하였으며 30년간 지회장으로 일하다 저희 지역 일대의 세종시 출범으로 지회가 지부로 갑작스러운 승격을 맞아 올해 1월부터 지부장이 되었습니다.”(박행남 지부장)

세종시특별자치시 보훈단체협의회장의 경우는 기존 지역에 있던 보훈단체들이 협의회로 활동하고 있었는데 일부만 세종특별자치시 지회에서 지부로 승격되어 협의회에 있던 기존 보훈단체 일부만이 지부 승격되는 등 하였으나 2023년 세종특별자치시 9개 보훈단체 전체가 지부가 되면서 세종시특별자치시 보훈단체로 새출발하며 지회협의회장이던 박행남 지부장이 지부협의회 회장직을 맡게 되었다.

 

공주시가 고향

그가 회장직을 맡기 이전에는 현 세종시특별자치시 보훈단체협의회장의 모태인 충남, 대전 일대에 두 분의 회장이 계셨는데, 예전 대한민국 상이군경회 충청남도지부장과 대한민국 상이군경회 중앙회장까지 하셨던 한 분(성명미상)과 공주시지회장이던 이기영이라는 분으로 지역 내 보훈단체의 산증인이지만 모두 돌아가셨다고 한다.

공주시의 경우는 박행남 지부장이 출생한 고향으로, 공주시 보훈단체의 일도 맡았기 때문에 그가 일하던 당시의 기억도 생생하다.

“처음 제가 상이군경회 세종시 이전 연기군 지회에 있었던 때는 지회장으로 이성우라는 분이 계셨습니다. 이후 김호영이라는 분이 지회장이 되셨고 이분이 돌아가시고 조치원 역전 앞 춘천여인숙을 운영하시던 이원익이라는 분이 지회장이 되셨는데 이 지역에 오래 사신 분이 있다면 한 번쯤 들어보셨을 수도 있는 분들입니다. 이후에 제가 연기군지회장이 되었는데 그때에는 자그마한 지회 사무실 하나에 미망인회, 유족회 등의 유공자 단체가 함께 입주해 있었습니다.”

그의 선배들은 보훈단체의 위상을 재고하기 위한 노력을 기울였고 이러한 노력은 후배 국가유공자들에게 전승되어 국가유공자로서 자긍심을 함양하고 함께 나라를 지킨 전우이자 사회를 지탱해 왔던 동료로서 회원복지와 회원 간 단합, 사랑의 실천을 위해 지역에 봉사하고 시민과의 상생을 이끌어가고 있다.

 

끝으로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행정구역의 변동은 있었지만 충남, 대전 일대의 보훈단체들은 그대로 운영되어 왔다고 한다. 하지만 시대상의 반영이 있어서 국가 지원의 경우 초기에는 거의 없다가 조금씩 운영비 보조 등으로 형태를 갖춰 왔지만 아직 부족한 점은 많다.

세종시특별자치시 보훈단체협의회장으로서 세종시 보훈단체를 총괄하고 직접 대한민국상이군경회 세종특별자치시 지부장을 운영하며 절실한 것이 인건비 문제와 차량 제공의 문제다.

“현재 회원들을 위한 사무실을 운영하며 실무를 맡는 직원들의 임금이 최저임금에도 미치지 못하는 정도입니다. 반드시 필요한 직원들만 근무하고 있음에도 인건비 문제는 언제나 난관에 부딪힙니다. 또, 타 시군 보훈단체들과 달리 자리 잡은지 오래되지 않은 탓에 충남지부 등과 달리 아직 차량이 없습니다. 세종시 9개 보훈단체 전부가 차량을 미보유 중인데 이 중 몇 군데만이라도 차량을 갖추었으면 합니다. 직접 시에 건의도 해 보았지만 아직 대답은 없는 상태입니다.”(박행남 지부장)

또한, “세종시지부로 승격되면서 아직 회비를 걷지 않고 있습니다. 회비를 걷는 문제를 현재 준비 중에 있습니다.”라며, “아직 지부 역할을 못하고 있는데 지회가 없다는 사실도 한 가지 이유입니다. 구청이 없기 때문에 지회를 못 만드는 것인데 지회가 있었다면 운영이 좀 더 나았지 않았을까 생각합니다.”라고 의견을 밝혔다.

현실 앞에 당당하고 한 점 부끄러움 없이 어려웠던 과거를 추억할 수 있는 이유는 나라를 생각하는 의지 하나로 수 없는 어려움을 견뎌냈기 때문이다. 국가유공자로서의 명예는 언제가 되어도 사라지지 않을 것이라는 약속이 필요한 것으로 보인다. 이를 위해 시민사회는 박행남지부장을 필두로 한 여러 회원들에게 재활과 자립에 대한 지원과 예우에 충실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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