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론토 코리안 뉴스'(월간 시사잡지) 김정남 편집인
'토론토 코리안 뉴스'(월간 시사잡지) 김정남 편집인

 

자유민주주의 및 자유시장경제의 대한민국 국적 택하자 북한측으로부터‘반역자’로 매도당해 한민족(韓民族) 역사상 최초로 인도(印度)에 정착, 이민자로서 적응에 성공하여 우리 캐나다 동포들에게도 '롤 모델'이 아닐까?

7월 27일 6·25 한국전쟁이 정전(停戰) 또는 휴전(休戰)한 지 벌써 70주년이 된다. 1960년 발표된 최인훈의 ‘소설 광장(廣場)’에선 주인공인 북한 인민군 반공포로 (反共捕虜) 이명준이 남한이나 북한을 택하지 않고 제3국, 중립국을 택해 인도(印度)로 배를 타고 가다가 바닷속에 빠져 사라진다. 인도로 해항(海航)중에 세상을 떠나는 이명준과는 달리 휴전협정 다음해 1954년 한민족(韓民族) 역사상 최초로 인도(印度) 땅에 정착, 열심히 살았던 북한 인민군 포로출신 5명이 있다. 당시 남북한의 이념 대결이 싫어 제3국, 중립국을 택한 88명의 반공포로 (反共捕虜)들중 일부다.

필자가 인도정부와 한국정부의 초청으로 인도를 네 차례나 방문하면서 휴전협정 후 북한인민군 포로출신으로 인도 1세대 교포 5명에 대해 전해들었다. 한국 대사관 및 영사관 관계자들로부터 알게 된 이들 5명의 파란만장한 서사적(敍事的) 인간 드라마는 이념이 무엇이며 조국이 무엇이며 인간적 삶이 무엇인지에 대해 그 어떤 소설이나 영화보다 더 가슴 뭉쿨한 인간 실존의 편린(片鱗)을 알게 해주는 귀중한 분들이었다. 중립국을 택한 88명의 포로 중 5명이 멕시코로 가려다 멕시코정부가 약속을 어기는 바람에 인도에 눌러 살았고 인도 교포 1세대로 기록된 것이다.

6·25 전쟁중 포로당시 북한인민군 소위나 중위계급의 장교였던 지기철, 최인철, 현동화,장기화, 지신영등 5명.

장기화씨는 1990년대 중반 오토바이 사고로 사망했으며, 지기철씨는 1998년에, 최인철씨는 2010년 각각 별세했다. 인도 한인회장을 20여년간 역임한 현동화씨도 2년전 2021년 2월 타계했다. (향년 89세).

인도 남부 카르나타카주(州) 최대 도시 뱅갈로에서 시계 방을 차려 생활했던 지신영씨의 행방은 묘연하다.

1962년 인도의 수도 뉴델리에 공관을 설치한 북한은 처음엔 이들에게 파티초청장이나 "남조선은 거지들이 득실거리고 사회적으로 극심하게 혼란하다"는 등 과장-왜곡 보도한 북한 잡지들을 보내 추파를 던졌으나 이것들을 모두 돌려보내고 냉담한 태도로 친북(親北) 회유를 뿌리치는 바람에 북한측에선 이들을 ‘배반자’, ‘반역자’라고 낙인찍었다고 한다. 이들은 자유민주주의및 자유시장경제 체제의 대한민국 국적을 취득한 것이다.

이들 5명 모두 생면부지(生面不知) 인도를 선택한 동기는 남북한 3년간 동족상잔(同族相殘)의 이념전쟁에서 벗어나고 싶은 것으로 알려졌다.

일부에선 친공(親共)도 아닌 반공(反共)도 아닌 회색분자(灰色 分子)라고 지적하기도 한다.

1923년 경상북도 예천에서 태어나 만주에서 성장한 지기철씨는 일본 관동군으로 태평양전쟁에, 1945년 8월 15일 광복되자 북한의 조선의용군으로 중국 국공(國共) 내전에 끌려갔으며 1950년 6·25 전쟁에선 북한의 인민군으로 차출됐다가 유엔군의 포로가 된다. 지기철씨는 현동화씨와 함께 인도 정착초기에는 양계로 생계를 시작했다.

지씨의 경우 양계장에다 과수·야채도 취급하는 농장을 하던 43세 되던 1964년 결혼했다. 뉴델리 한국 공관 직원들의 주선으로 사진으로 선을 보고 당시 26세의 이선재씨를 아내로 맞아들인 것이다. 슬하에 아들만 둘을 두었다.

지기철씨는 한국에서 가발수출 붐이 한창일 때 인도 남부 타밀나두주(州) 타밀여인들의 인모(人毛)를 수집, 한국에 수출해 돈을 벌었다고 한다. 한국여자들처럼 댕기머리를 하는 타밀여인들의 머리카락 인모(人毛)가 우리 한국 여인들의 인모(人毛)와 질적으로 유사하다고 한다.

인도정부 공보부에서 사진사로 재직중인 북한 인민군 포로 출신 동료 최인철씨가 귀띔해준 정보다. 지기철씨는 최인철씨와 함께 타밀나두주(州) 주도 마드라스(나중에 '첸나이'로 이름 바꿈)로 갔다. 지기철씨는 다음과 같이 회상(回想)했다.

"힌두교 사원에 가보니 머리카락이 부대에 넣어져 지하실에 꽉 차 있었다. 힌두교 여인들이 남편이 숨을 거두면 '힌두신과 남편을 위해 내 머리를 바칩니다'라며 오랫동안 사원에 바친 것이라는 이야기다. 마드라스에서 이 머리카락을 트턱3대에 싣고 오면서 욕심이 더 발동해 들르는 곳마다 머리카락을 사 모았다. 낮에는 너무 더워 꼼짝 못하고 밤에만 차를 몰았다.

뉴델리에 도착할 때까지 꼬박 1주일, 거지 몰골로 돌아왔다. 가발 수출로 1968년부터 70년까지 해마다 1백만달러의 거래실적을 올렸으니 상당한 부(富)를 축적했다고 볼 수 있다."

인모(人毛)수출이 사양길에 들어서자 지기철씨는 1974년부터 봉제품 수출에 손을 대어 한때 공장 고용원이 2백여명, 봉제기가 2백50대에 이르기도 했다.

지기철씨는 "사업 한 번 크게 해보고 싶었다"라고 스스로 말한대로 미국이 아니더라도 인도에서 사업가로서 성공한 셈이다.

지기철씨는 인도 거주 한인들의 모임인 인도한인회 회장을 맡아 봉사하다가 1998년 75세 나이로 파란만장한 삶을 마감하고 세상을 떠났다.

1932년 함경북도 청진출생의 현동화씨도 양계를 그만두고 지기철씨처럼 가발 수출에 뛰어들었다.

인모(人毛)수출이 내리막길로 빠지기 시작한 1972년 한국의 승리기계회사가 아프가니스탄에 방직공장을 플랜트수출하면서 현지 사정에 밝은 현동화씨가 다리 역할을 했었다. 중동 (中東) 건설붐이 일었을 때는 인도 노무자들을 중동진출한 한국기업들에 보내기도 했다.

그러다가 경천동지(驚天動地)의 소식을 듣게 된다.

모두 사망한 줄 알았던 어머니와 형제들이 이미 북한을 탈출, 대한민국에서 버젓이 살고있다는 것이다. 하여 1969년 15년만에 감격의 눈물을 흘리며 가족들과 상봉한다. 동시에 현동화씨는 37세의 노총각으로 서울시민회관에서 인도총영사를 지낸 임병직씨의 중매와 주례로 윤춘자씨와 결혼, 자녀 2명(1남1녀)를 두게 된다.

중립국행을 택해 인도(印度)에 정착한 데 후회하지는 않느냐는 질문에 현동화씨는 "열심히 살았고 그때마다 한국과 인도의 관계가 좋아졌기에 후회는 없다"고 답했다.

1928년 함경남도 함흥출생의 최인철씨는 북한 인민군에 사진사로 차출되어 복역하다 포로가 됐다. 하여 인도군의 육군 공보실에서 사진 작업을 하다가 인도문화공보부 임시직으로, 그리고 정식직원이 되어 20년간 꼬박 인도를 위해 근무했다. 그래서 말년에 최인철씨는 인도 정부에서 주는 연금으로 용돈을 충당했다.

1978년 인도주재 이범석 대사가 뉴델리의 한국대사관을 신축하고자 할 때 인도 인부들을 다루고 모든 것을 맡길 수 있는 믿을 만한 한인 교포가 필요해 최인철씨가 뽑혔고 한국대사관에서 행정직원으로 21년간 근무한다.

네팔여인과 동거하며 살다가 2010년 자녀없이 쓸쓸히 타계했다.

한민족(韓民族) 역사상 처음 낯설고 물설은 인도(印度)에 도착, ‘맨 땅에 헤딩’ 한 이들 북한인민군 포로출신들은...

나름대로 새로운 삶을 개척하고 뿌리를 내린 서사적(敍事的) 인생 드라마를 연출한 것이다. 이들 인도 한인 교포 1세대의 뛰어난 사업 활동이 이젠 한국의 삼성, LG,현대,포스코(포항제철), 롯데등등 굴지의 대기업들로 확산-발전하여 인도땅에 이들 기업들이 생산한 한국제품들이 인기 폭발하고 있는 중이다. 소설가 최인훈의 ‘가상의 광장’에서 한국 기업들이 안착, 꾸준히 성장해 가고 있는 ‘실재의 광장’으로 변해가고 있다고 하겠다.

아울러 캐나다땅에 뿌리내리려는 우리 한인 캐나다 동포들에겐 이국(異國)땅에서 어떻게 개척하고 발전을 이룰 것인 지 곱씹어 보는 ‘롤 모델’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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