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전쟁, 바로알기가 중요하다.

대한민국 6·25참전 유공자회 청주시지회 박성규 지회장
대한민국 6·25참전 유공자회 청주시지회 박성규 지회장

 

비극적인 전쟁을 다시 겪지 않기 위해 투철한 안보관과 호국정신 교육하겠다.

 

충북 최대의 중심지로 인구 86만여 명의 청주시에 560명의 6·25참전유공자들이 거주하고 있다.

6·25참전유공자회 청주시지회(회장 박성규)는 이들 유공자들과 보훈가족의 복지증진과 6·25전쟁의 참상을 알리고 일제강점기와 전쟁을 겪었던 굴곡진 인생 경험을 바탕으로 생생한 이야기를 시민들과 초·중·고 학생들에게 들려주려 하고 있다.

박성규 지회장에 따르면 “애국심, 충성심, 동료애 등으로 나라를 지키고 산화한 순국선열들의 얼과 희생을 기리는 안보 교육이야말로 쇠퇴해가는 젊은 세대의 국가관을 강화할 수 있는 방법”이다. “우리는 끝난 전쟁에 대해 말하고 있지 않습니다.·전쟁이 끝난 것이 아닌 휴전되어 있는 가운데 살아가면서 투철한 호국정신 없이는 또 다시 우리 세대 같은 비극을 겪을 것입니다.” 박성규 지회장은 이러한 안보교육의 절실함을 강조하며 “올해에는 학교 대상 안보교육활동을 강화하고 싶습니다.”라고 밝혀왔다.

 

6·25참전 경위와 당시 긴박했던 전투들. 백병전 치르기도.

6·25참전유공자회 청주시지회 박성규 지회장은 지난 2월 10일에 취임했다. “6·25전쟁 참전의 경우 당시 백선엽 장군이 사단장이던 1사단 12연대에서 복무했고 낙동강 최후의 방어선이었던 다부동 전투에서 첫 전투를 맞이했습니다. 1950년 8월 11일의 일입니다. 당시 17세로 8월 10일 자대를 배치 받고 다음날 곧바로 전투에 투입되었습니다.”

청주공업중학교 4학년 재학 중에 6·25전쟁이 발발했고(1950년) 그해 7월 초 피난을 가 8월 경에 대구에 피난할 수 있었다. 당시의 진상을 목격한 바에 따르면 거리에서의 모병이 흔해 길에서 징병과 징집이 이루어지기도 했다고 한다.

박성규 지회장은 배가 고파 자원으로 입대한 경우다. 피난 간 대구의 한 학교 운동장에서 흰 쌀로 지은 주먹밥을 나누어 주는 것을 보고 모병에 응했다. 학도병으로 자원입대를 실행한 당시 이미 부대는 4번의 백병전을 치른 상태였다.

“백병전이란 맨몸이나 다름없는 상태에서 총검 하나만 들고 부딪혀 싸우는 전투를 말합니다.”

박성규 지회장은 치열했던 당시의 전투를 지금도 선명히 기억한다며 “피가 강을 이루고 바다를 이루고 있었습니다.

총검으로 베고 찔러 죽이는데 붉은 피를 보자 엄습해오는 긴박감과 곧 죽을 것 같은 공포감에 떨어야 했습니다. 하지만 이겨내야 했습니다. 살아남겠다는 생각 하나로 전투에 임했고 다행히 살아남을 수 있었습니다.”라고 당시를 회상했다.

다행히도 이러한 백병전을 8번이나 치르고도 그는 무사히 살아 돌아왔다. 이에 더해 그는,“힘겹게 싸웠습니다.

그런데 이후의 인생도 싸움의 연속이었습니다. 저희 세대는 희생정신 없이는 설명할 수 없는 시대를 살았습니다. 이후 국가발전의 초석을 놓기 위해 쉼 없이 일하고 나와 국가, 가족의 평안을 위해 최선을 다했습니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박성규 지회장과 순국한 그의 전우, 동료들이 애국선열로써 우리를 지켜내 준 것이다. “국가 없이 우리는 살지 못합니다. 무엇이 우리를 지켜줄 수 있습니까. 국가가 있었기에 자유 민주주의를 쟁취하고 유지할 수 있었습니다.”

절체절명의 백병전 외에 충주 동락초등학교에서 치른 동락전투와 철원 일대에서 벌어진 철의 삼각지 전투 역시 청주시 지회에서 기념하고 있다.

 

“학생들의 안보교육 강화에 투철한 사명감을 가지고 임하고 있습니다.”

“요즘 학생들의 안보관에 대한 염려를 많이 합니다.”라고 말한 그는 “올해 안보 강연 대상 학교를 50~80군데 학교를 목표로 정했습니다. 이는 올해 저희의 역점사업이기도 합니다.”라고 밝혔다. 하지만 이 사업도 차질을 빚을 염려가 있다. 각 학교들이 학생대상 안보교육에 적극적이지 않기 때문이다. 이 점은 안보교육과 애국심 함양, 6·25바로알기 등에 있어 걸림돌이 되는 부분이다. 우리의 미래세대도 국가와 사회를 안전하게 지켜내야 할 의무가 있기 때문이다.

그에 따르면 “저희 세대는 위정자 이상으로 나라를 걱정하고 있습니다. 애국이 뭔지, 충성이 뭔지에 대해 학교에서 못 가르치는 부분을 안보교육을 통해 교육합니다. 교육은 ‘백년지대계’이기 때문에 이를 중시하고 있습니다.”라고 한다.

 

지회와 회원들을 위해 어떤 일을 하는지

청주시 6·25참전 유공자 회원들과 보훈단체 지회를 위해 하는 일로 그는 우선 “회원실태 파악”을 중시한다고 밝혔다.

“현재 저희가 직면한 가장 큰 문제는 회원 감소입니다. 평균연령이 94세로 일년에 3~40명 정도가 사망하고 있습니다. 이토록 연령이 높고 비록 회원 수가 청주에만 560명이라고 해도 이 중 400명 정도는 거동이 불편하고 요양원에 입원해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회원으로 정상적인 활동을 하는 회원은 150명 정도라고 한다. 이 회원들이 모여 힘들고 병든 회원들을 대상으로 위문을 하고 지원을 해 전우애를 실천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박성규 지회장은 “국가유공자로서 품격과 명예를 지키고 싶은데 잘되고 있지 않다.”고 말하며 지회운영비에 대해서는 회원들과 시민들의 찬조금을 조금씩 받고 있다고 밝히기도 했다.

“국가에서 나오는 보훈 수당이 참전명예수당으로 지급되고 있습니다. 그밖에 시에서 나오는 보조금이 있는데 금액이 적어 지회운영 경비로 쓰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와 운영위원 25명이 각각 500만원과 20만원씩을 사비로 지출했다. 회원들의 경우 일인당 연3만원을 내고 있고 이 돈을 활용해 회원들의 위문과 보훈강연, 전적지 순례 등을 하고 있다. 청주시에는 10개의 보훈단체들이 있고 이들의 사정은 비슷하다. 박성규 지회장은 “시에서 보조하는 점심 식대나 판공비가 없어 아쉽다.”며 “정부와 지자체에 판공비 50만원을 지회장들에게 지급해 달라고 요청해 본 적도 있다.”고 밝혔다.

“저희 회원들은 연초가 되면 항상 올해에는 더 많은 활동을 하고 싶다고 결심합니다. 금년도 이런 결심이 실행되기를 바라는 바입니다.”

또한, 6·25참전유공자회 청주시 지회는 안보정세 보고회를 2월에 열고 운영위원회의를 정기적으로 가지며 지회의 발전방향을 모색하고 있다. 5, 6, 7월에는 초중고를 순회하며 안보교육을 진행해 지난 해에는 1,678명, 8개 학교를 교육하여 그 결과 최우수 시 지회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회원복지 증진을 위해 회원 실태파악에 중점 두겠다.

그가 보기에 6·25참전유공자들의 신상이 현 시대에 이르러도 정확히 파악되지 않고 있다. 장렬한 죽음을 맞아도 통계에 없거나 특히 유공자로 지정되거나 보훈가족이 되어도 생활이 어떤지 통계가 없다고 한다.

그래서 그는 올해 6월까지 회원들을 방문해 생활수준을 파악하려 하고 있다. 유공자들이 어떻게 사는지 일일이 알리기는 어려운 일이다. 하지만 보다 세밀한 건의를 하고 싶어 막연한 요청보다 근거를 가지고 도움을 구하고 싶다고 한다.

“회원실태에 대해 자세히 알아보려 합니다. 이를 위해 경비도 많이 들 것입니다. 일 년에 3~40명이 사망하는데 정부에서 그 때마다 30만원을 지급합니다. 지회에서는 10만원과 조화를 올해부터 보내려 하고 있습니다.”

 

일제 강점기와 6·25전쟁, 산업화 과정을 모두 겪은 역사의 산증인으로서

1934년생인 박성규 지회장은 일제 강점기에 유년시절을 보낸 역사의 산증인 이기도 하다. 그는 광복 이후 중학교에 입학할 때까지 한글을 몰랐다고 한다. 당시 일제의 교육정책이 국민적어(國民的語)였고 일본어만 배우게 할 때였기 때문이다.

머리를 짧게 깎고 창씨개명을 해 일본어로 학교를 다녔지만 당시에도 차별이 강해 지역마다 일본인만 다닐 수 있는 학교들이 있었다.

청주에서는 이후 도의회 사무실로 사용된 동정국민학교와 청주공고가된 청주제2중학교(일본인학교)가 이에 해당했다.

한편, 당시 청주에는 다섯 군데의 중학교가 있었는데 이는 모두 6년제의 중학교로 청주중학교와 농업중학교, 상업중학교, 사범중학교, 공업중학교가 개교해 있었다.

학창시절의 기억은 묘심기나 콩 경작, 군수물자였던 송진을 채취했던 기억이 남아 있고 교사의 경우 1/3이 일본인이었는데 그 중 담임이었던 ‘아트마’선생님이 기억난다고 한다. 또한, 당시에도 일본에 대한 감정이 좋지 않아 왜놈이라는 말이 흔했다고 한다.

광복이 된 후에는 좌우 이념대립으로 각지에서 대동청년단이나 서북청년단, 남로당 등으로 나뉘어 치열한 싸움을 벌이기도 했다고 한다.

 

현재에 이르기까지와 최후까지 지켜낼 것이 있다면.

박성규 지회장은 참전 이후 사회에 진출해 일본과 관련된 무역업에 잠시 종사했다. 그리고 이후 현 청주 HCN의 모태가 된 청주방송을 설립하여 운영하였다. YS당시 종합유선방송이 허용되어 일찌감치 지역 케이블 방송사를 설립한 것이다. 또한, 로터리 클럽 3740지구의 대표를 맡았으며 청주공업고등학교 충동문회장을 10년간 맡아 활발한 사회활동을 했다.

청주대학을 졸업했으며 현재는 지회의 성공적인 운영과 조직의 활성화를 위해 공군예비역 준사관 출신인 김승규 사무국장과 그 뜻을 함께하고 있다.

그는 마지막으로, “6·25전쟁 바로알리기와 전우였던 애국선열, 살아남은 유공자들의 명예를 회복하고 싶습니다. 살아오며 6·25전쟁 참상에 대한 젊은 세대의 인식 부족과 일부사람들의 6·25전쟁에 대한 편견을 보면서 순국한 전우들과 저희 유공자, 보훈가족의 명예회복이 시급하다고 생각합니다.”라고 말하며 인터뷰를 마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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