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 ‘정치광장’ 壽城 川 邊과 거지 씨 (마지막 회)

대권후보 등 정치인들 거쳐간 역사의 현장
한때 수많은 거지들-지금은 ‘시민공원’
대구 도심을 가로질러 흐르는 수성 천, 한 때 ‘정치광장’이던 이곳은 거지들이 우글거리고 악취가 풍기는 오염 천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제방과 둑이 쌓이고 고수부지 공사가 잘 이루어져 맑은 물이 흐르고, 장대비라도 내리는 날엔 낙동강 금호강 물고기들이 오르며, 아침저녁으로는 건강체조 조깅 등으로 건강을 다지는 시민의 관장으로 바뀌었다.
김한길 著 취재외길 오십년 <거지에서 대통령까지> 중에서

해방이후 60년 대 까지 만해도 한마디로 쓰레기 퇴적물들이 쌓인 천이었다. 가창 골에서 흘러내린 물줄기를 타고, 주택가 등에서 내다버린 온갖 쓰레기 들이쌓이고 썩어 악취가 풍기고 모기 파리 벌레 가 우글거렸다. 이 틈새에 거지패거리들도 끼어 들어 가마니 판자 궤 짝 등으로 움막집을 짓고 살았다. 고물을 주어다 파는 넝마주이, 상가 (喪家)나 잔치 집을 찾아 술밥을 얻어먹고 돈까지 요구하며 행패를 부리는 무리도 있었다. 절도 폭력을 행사하다 경찰신세를 지는 자도 있어 경찰은 이 일대를 우범지대로 지정한바있다.
그리고 잊혀지지 않는 것은 이 일대가 60~70년대의 정치광장이었다는 점이다. 윤보선 민정당 총재, 박정희 공화당 대통령후보, 유진오 신민당 총재 등이 이곳에 운집한 수십만 청중 앞에서 사자후를 토한 역사적인 장소였으며, 이렇게 수성 천 변은 거지와 대통령(후보)이 거쳐가기도 한 역사의 현장이다.

박정희 대통령후보, 윤보선, 유진오 야당 총재
수십만 군중 앞에서 사자후 토하며 지지 호소


나는 1967년3월 대구시내의 거지 패거리들의 행패를 집중취재 해 사회면 TOP기사로 보도, 사회문제화 시켰다. -요즘 대구시내에는 10~20명씩 떼를 지은 거지 패들이 상가나 잔치 집에 몰려들어 술. 밥에다 거액의 금품까지 요구하는 등 행패가 심해 사회문제가 되고있다...는 요지이다. A상가 집의 경우 이른 아침부터 10여명이 몰려와 집 앞에 진을 치고, ‘궂은 일을 다 도와 드리고 다른 패거리가 접근하지 못 하도록 막아 주겠다’며 접근, 거액을 요구했다. 상주 측에서 ‘술과 밥은 주지만 그렇게 많은 돈은 줄 수 없다’고 하자 집기를 부수며 행패를 부리다 경찰에 연행됐다.
B잔치 집에서도 이들과 유사한 3개 팀이 나타나 각각 1상 씩 대접을 받고, 다시 ‘거지복채’를 달라고 강요해 모두 1만원 상당을 갈취 당했다. 이밖에도 대구 부근 도시까지 합쳐 하루 10여건의 길. 흉 사 집 행패사건이 일어나 일반의 피해가 늘어나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이 기사가 보도된 후 경찰은 일제단속에 나서 모두 50여명을 잡아 들였다. 이들 중 40여명이 수성 천 변 움막집에서 사는 ‘거지’들이었다.
이 기사를 보도하고 난 3년 후인 1970년3월28일나는 모친상을 당했다. 신문에 부고가 나가자 바로 그들 한패 6~7명이 나타났다. 자리(주도권)를 먼저 잡기 위해 부리나케 달려 온 것이다. 마침 문상을 왔던 형사계장이 이를 눈치채고, “요즘은 조용한 것 같더니 또 시작인가”라며 나가면서 해산시키겠다고 했다. 나는 계장에게 ‘잘 타일러보내고 그 우두머리에게 장례 끝나고 나하고 만나게 해 달라’고 부탁했다. ‘거지의 사연’을 한번 캐보려는 직업의식에서다.
상사를 마치고 신문사에 나간 다음날 한 통의 편지가 왔다. -김 계장 님 말씀 잘 들었습니다. 수성 천 변에서 빌어먹고 사는 이상수(가명)입니다. 만나 보자고 하시니 내 연락처를 알려 드립니다. 내 주소는 수성 천 중동 쪽 도로변 일반 판자 집 뒤 방 천 둑 밑인데 문패도 없고 벽돌로 벽을 쌓아올리고 그 위에다 천막 쪼가리 등으로 지붕을 이어 놨어요. 그곳에 오시기 보다 부근 도로변 일반 판자 집 옆 ‘수성 집’ 식당으로 11시 반까지 오시면 됩니다. 그 기서 기다리겠습니다...
또닥또닥 써 놓은 글씨가 제법이었다. 나는 열 일을 제치고 달려갔다. 11시25분, 미닫이 식으로 된 식당 문을 열고 들어서니 청년 1명이 고개를 떨구고 앉아 있었다. 찬거리를 준비하던 아주머니에게 영남일보에서 왔다고 했더니, 그 청년 쪽을 가리켰다. 눈치를 챘던지 푸시시 일어선 그 청년이 90도로 허리를 굽혀 인사를 했다. “죄송합니다. 감사합니다.”라며...며칠 전의 거지모습은 간데 없고, 눈동자가 살아있는 건장한 청년이었다. 이목구비(耳目口鼻)도 반반했다. 좁은 객석에 3~4개의 탁자, 우리는 1개의 탁자를 차지해 마주 앉았다. 다행이 다른 손님은 없었다.


내가 만난 거지 씨는 6.25 전쟁고아
고향서 ‘열심히 산다’감사편지


나는 앉자마자 “백반은 좀 있다 주시고 먼저 막걸리에다 돼지고기 한 접시부터 주시요”고 주문했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얼굴도 미남이고 장골로 생겼는데... 이곳에 온지가 오래 됐는가요.”
“네...”
“부모형제는 어디 계시는데”
“없습니다.”
“고아인가”
“예...”
그는 마지못해 대답만 하는 것 같았다. 무언가 숨겨진 사연이 있는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막걸리 잔 만 비우는 그에게 나는 역으로 ‘나의 과거’를 털어놓았다. “사람은 누구나 과거가 다 있는 법이야”라며... “나는 세살 때 아버지가 돌아가시는 바람에 아버지 얼굴도 모르고 편모 밑에서 고아 아닌 고아로 자랐어. 어릴 때 가출도 하고 청소부 배달부도하고 탈영병도 되고 유도 실습한답시고 사창가 깡패들에게 시비를 걸어 싸움질도 하고...소년시절 안 해 본 게 없어요. 그러면서도 좌절하지 않고 열심히 공부하며 꿈과 희망을 버리지 않고 살아왔어. 해 내겠다는 마음, 나는 할 수 있다는 결심만 있으면 되는 거야.”
거저 거지행세를 하고있는 멀쩡한 청년이 보기 안타까워서였는지, 내 이야기가 진지해 졌다. 막걸리와 돼지고기를 더 갖고 온 아주머니가 “이 씨 아저씨 참 좋은 분이요, 전라도 여수 쪽이 고향인 모양인데 못 가고 있는 것 같아요.”고 한 마디 거들었다. 그러자 취기를 띈 이 씨가 울먹이며 입을 열었다.
“형 님 ! 선생님... 저도 가출했습니다. 너무나 배가 고파 남의 집 물건을 훔치고 하다, 집을 나왔지요. 남의 집 농사를 지으며 살아온 우리 집은 끼니를 거를 때가 더 많을 정도로 가난했습니다. 초등학교에 다닐 때부터 싸움질하고 6.25전쟁 때는 부모와 4남매가 뿔뿔이 헤어지고, 며칠을 굶기도 하고... 죽을 생각도 여러 번 했지요. 그때마다 ‘한번 잘살아보고 죽어야지’ 하는 꿈을 가졌지요. 그리고 광주로 가서 떠돌아다니다가 김천을 거쳐 대구까지 왔어요. 대구 역전에서 2년 동안 구걸생활을 하며 살다가 이곳으로 왔습니다. 여기에서 나이 많은 분 한 분을 만나 그분하고 고물을 주어다 팔아 밑천이 되면 고향으로 갈려고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잘 안됩니다.”...
그는 목이 메어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세상살이가 너무 힘들고 고달프다는 것이다. 고물을 팔아 끼니는 해결하려고 해도 그게 잘 안 돼 체면 불구하고 거지 짓을 하게되었고, 그래도 배불리 먹을 수 있는 날이 상가 집 잔치 집이 여서 그 쪽으로 눈을 돌리게 되었으며, 상가나 잔치 소식은 신문에서 얻는다고 한다.

“장골이 뭘 못해 힘냅시다“ 촌지봉투에 돈 더 넣어 주며 격려

나는 점심을 먹으면서 1시간 반이 넘게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의 딱한 사정을 들으며 나도 모르게 친근감이 들었다. ‘가난이 원수지. 환경이 거지를 만들었어...날 때부터 거지로 타고 난 건 아니 지 안나’...이런 생각을 하면서 미리 준비해간 촌지봉투에 돈을 더 보태 손에 쥐어 주었다. 그리고 여기 오래 있지 말고 빨리 고향으로 가라고 부탁했다. “사지가 멀쩡한 장골이 뭘 못해 열심히 하면 꼭 성공 할 꺼야 힘냅시다.”이렇게 격려를 하고 식당을 나섰다.
그리고 세월이 한참 흘렀다. ‘새마을’노래가 전국 방방곡곡에 울려 퍼지고 마을마다 소득 증대 환경개선사업 등이 활발히 추진되고 있을 무렵이다. 50대 후반으로 보이는 한 남자가 신문사에 나타나 내 앞으로 된 꾸러미 한 개를 전했다.
시멘트 종이에 싼 미역과 김이었다. “내가 대구 행 버스를 타려는데 한 청년이 꼭 전해 달라고 택시 비까지 주며 부탁하기에 갖고 왔다”며 그 청년은 김 미역 양식과 어장 일을 하고있다는 말만 남기고 가 버렸다고 했다. 꾸러미 속에는 노트를 찢어 쓴 편지 한 장이 들어 있었다.

-김 선생님 !안녕하십니까. 저는 선생님을 만나고 난 얼마 후 그곳을 떠나 여수의 섬 마을로 왔습니다. ‘구인’ 광고를 보고 찾아 간 곳이 미역 김 양식장이고, 주인 부부가 저를 자식처럼 잘 대해주시고 기술도 많이 배웠습니다. 꿈을 가지고 열심히 일하고 월급을 저축하여 적당한 곳에 어물전도 차릴 생각입니다. 그리고 결혼도하고요. 이렇게 저가 희망을 가지게 된 것도 모두가 선생님의 덕분이라고 생각합니다. 자리가 잡히는 대로 나의 은인이신 선생님을 꼭 찾아뵙겠습니다. 그때까지 안녕히 계십시오....
날 자도 이름도 주소와 연락처도 적혀 있지 않았다.

편지를 읽고 난 나는 참으로 흐뭇했다. 결국 바른 길을 찾아간 그의 모습이 아름답게 떠올랐다. 당장이라도 축하 편지를 보내고 싶었지만 보낼 수가 없었다. ‘거지생활’을 털고 새 길을 찾은 그에게 박수를 보내며, 다시 만나는 그 날 까지 기다리기로 했다. 그러나 이후 내가 직장을 옮기고 해서인지 아직 연락이 닿지 않았다. 그렇지만 나는 그가 성공을 거두고 아들 딸 놓고 행복하게 잘 살고 있을 것이라 고 믿고있으며, 지금도 그의 행운을 빌고있다. <끝>

지난 2007년 7월 15일자부터 2년여에 걸쳐 매호마다 연재된 김한길 著 취재외길 오십년 <거지에서 대통령까지> 취재현장 이야기는 이번 호 <27>회로 끝을 냅니다, 그동안 성원을 보내주신 각계각층의 많은 분들께 감사를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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