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모니즘은 추상과 구상이 서로 다투지 않고

서로를 빛나게 도우면서 같은 화폭 속에서
공존하게 하는 것으로, 이렇게 배치된 것은 제가 처음입니다.” 

<24> 조형주의 미술 창시자 金興洙 화백 
음양조형주의 (陰陽造型主義)미술 창시자인 김흥수 화백을 찾아간 것은 1997년 11월 11일, 겨울 날씨답지 않게 푸근한 오후였다. 서울 서초구 방배동 전철역 쪽에서 마을 버스로 10여분, 그의 아파트 입구에 들어서자 경비 아저씨가 ‘누구를 찾아왔느냐’고 물었다. “대한뉴스 논설주간인데 김흥수 화백과 2시에 약속이 되었다”고하자 “잠시만기다리 시던지, 아니면 바로 올라가라”고 안내했다. 그러면서 김 화백은 조금 전에 직접 차를 운전해 나갔는데 곧 올 겁니다. 그 분은 걸핏하면 차를 몰고 무얼 사러 나갔다가 오시곤 합니다.“고 덧붙였다.
“아니 ! 여든이 다 된 분인데 차를 그렇게 예사로 몹니까”... 내가 이외라는 듯 되묻자 수위 아저씨는 “이직 쟁쟁하십니다. 힘이 펄펄한 것 같아요”고 설명했다. ‘젊은 부인하고 사니까 회춘(回春) 이 되는 모양이지? ’...순간 이런 생각이 들었다. 김 화백은 지난 92년 1월에 43세 연하의 제자인 미술학도와 결혼해 화제를 모은 장본인이다.
약속시간이 다 되자 무언가를 사들고 온 그는 그것을 부인에게 넘겨주고 화실 겸용으로 된 넓은 마루 응접실에서 기자를 맞이했다. 소파 옆 (화실)에는 반쯤 된 나부 (裸婦) 뎃상이 버티고 있었다. 김 화백은 과연 건강한 모습이었다. 30여 평 규모의 중형 아파트엔 김 화백 부부가 살고, 처제가 가끔 와서 일을 도와주고 있다고 한다.
-지난번 조형주의미술선언 20주 년 기념 초대전 (조선일보 미술관: 6,27~7,11일)은 우리나라에서 조형주의미술의 장을 선포하는 계기가 되었을 줄 아는데...먼저 좀 생소하게 느껴지는 조형주의미술은 어떤 것인지 알려주시지요.
“조형주의 (하모니즘: Harmonism)이전까지 추상과 구상을, 전혀 다른 것으로 간주되어 같은 화면에 등장한 적이 없습니다. 그렇지만 저는 추상과 구상이 서로 다투지 않고 서로를 빛나게 도우면서 같은 화면 속에서 공존하게 만들었습니다. 추상과 구상이 한 화폭 속에 배치된 것은 제가 처음입니다.”
-하모니즘 선언은 지난 77년 7월7일 미국 워싱턴에서 있은 것으로 압니다. 그 동기와 배경은?
“좀 멀리 거슬러 올라갑니다. 6.25피난시절 부산 광복동 다방은 우리들 천국이었지요. 커피 한 잔 하고 죽치고 앉아 ‘타임지를 보니 추상화가 세계적 유행이더라. 우리도 추상화를 해야한다’고들 화가들은 입을 모았다. 그러나 나는 ‘무슨 소리냐 우리는 이 보다 한 발 앞선 것을 해야한다’며 그러면 무엇이 앞선 것일까 생각해 보았지. (중략)
추상화를 시작한 칸 딘스키는 주관적 느낌을 주관적으로 그렸다. 초현실주의 작가 달리는 주관적 세계를 객관적 입장에서 보여 주지 않았던가 !! 그렇다면 주관과 객관을 한 화면에 그리면 이들보다 앞선 것이 될 것이다... 나의 하모니즘미술 관은 이렇게 탄생했습니다. 그러나 아직 이름조차 못 붙인 채 막연한 느낌뿐이었어. 결국 나는 국내에서 빛을 보지 못했지요. 49년 제1회 국전에 입선된 야심작 150호의 ‘裸婦群像’은 부도덕하다는 이유로 전시 중 떼어졌고, 53년 ‘群童’과 함께 국전에 출품한 반 추상화 ‘침략자’는 심사위원들의 몰이해에 부딪치게 된 겁니다.“ (중략)
김 화백은 “이 사건이 그의 인생을 좌우하는 계기가 되었으며, 그를 인정하지 않는 국내 미술계에 더 이상 연연하지 않기로 하고, 55년 프랑스로 떠났다“고 한다.
“내 그림을 외국 작가들과 나란히 걸어놓고 보니 촌티가 역력해 다시 공부를 하여 내 자신의 눈이 뜨이게 되었지. 61년 두 번째 전시회 때는 그림이 다 팔려나갈 정도가 되었어요. 그런데 화상들이 제동을 걸었어. 내 그림이 점점 추상화가 되고있어 더 이상 추상이 진행되면 그림을 팔 수가 없다고...내가 그림을 팔기 위해 파리에 온 것이 아닌 데, 더 이상 있을 곳이 못된다고 판단하고 나는 67년 미국 무어 미술대학으로 가 교단에 서게 되었고, 이 무렵 하모니즘 미술의 형체가 가깝게 느껴지기 시작했어요. 77년 워싱턴에서의 IMF미술관 전시회개막에 맞춰 7월 7일 하모니즘 선언을 한 겁니다.”
*음과 양이 하나로 어울려 완전을 이룩하듯 사실적인 것과 추상적인 두 작품세계가 하나의 작품으로서 용해된 조화를 이룩할 때 造型의 영역을 넘은 오묘한 調型의 예술세계를 전개하게 된다.-
그러나 약소국의 이름 없는 화가는 주목을 끌지 못했다.
-귀국한 동기가 되었군요.
“83년에 귀국한 나는 돈도 없고 인정도 못 받는 불우한 화가로 일생을 마감하는 줄 알았지. 내가 돈 잘 벌기를 바랐던 전처는 내게 실망하고 떠나간 뒤였어. 내게 새 인생을 열어준 사람은 지금의 아내인 장수현 (31)입니다.
덕성여대 2학년 때 나를 만난 아내는 나를 세계적인 작가로 인정받게 하기 위해 9년 동안 자신을 포기하고 내 뒷바라지에만 헌신해왔어요.”
-하모니즘 대표작이라 할 수 있는, 100호 이상 대작 위주로 전시된 지난 번 초대전 (조선일보 미술관)에도 여성의 누드를 주제로 한 작품이 대부분이었는데...
“구상과 추상을 만나게 했다고 하지만 목적은 ‘그림은 아름다워야 하고 이야기를 담고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론만 있고 이데올로기만 있는 그림은 곤란합니다.”
그는 “전시작품 중 ‘미의 심판’은 완성까지 2년이 걸렸고, 17명의 등장 인물들의 포즈도 수십 번 고쳐 그렸으며, 이 작품은 그 동안 스케치한 100여명 모델의 다양한 포즈 중에서 고르고 고른 땀과 혼이 담겨있는 제 예술인생의 정수를 담은 것”이라고 덧붙였다.
대화가 막바지에 이르렀을 즈음 부인이 과일을 갖고 왔다. 엷게 화장을 한 모습이 ‘새색시’처럼 아름다워 보였다. 과일을 권하며 옆자리에 앉은 그를 보며 김 화백은 “우리 이렇게 잘 삽니다. 행복하게 잘 살고있어요. 아무 염려 없이 잘 살아요”라고 새삼 소개를 했다.
78세의 신랑과 43살 연하의 30대 신부, 5년 전 결혼 당시의 화제를 의식하듯 김 화백은 ‘행복’을 몇 번이나 되풀이했다. 부인도 함께 미소를 지어 보였다. 김 화백은 1919년 함흥에서 태어나 함흥 고 보에 들어가면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중3때 겨울 누가 보내온 꿩을 그려 ‘밤의 정물’이라는 제목으로 제16회 조선미술전람회에 입선했다. 그때 나이 17세. 동경 미술학교를 졸업하고, 프랑스유학, 미국 무어 미술대학 초빙교수, 프랑스 러시아서 개인전 등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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