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손 없이 간 주민 전 재산 소나무 앞으로 등기

<23> 장학금 내는 소나무 石松靈 

전국을 순회하며 좋은 기사를 발굴한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특별히 사전에 기획을 하여 그 부분을 심층취재 한다면 모르지만 그렇지 않고 그냥 다니면 ‘뜬구름 쫓는 꼴‘이 될 경우가 많다. 그야말로 시시각각으로 기지(機知)를 발휘하지 않으면 열흘동안의 출장기간을 헛수고만 하다 귀사하고 만다. 서울신문 편집국 수도권 부 의 ’순회취재반‘으로 경남지역을 거쳐 경북으로 간 나는 예천 군청에 들렀다. 박응규 군수로부터 예천 명품 ’예천 참기름‘ 보호운동에 관한 계획을 듣고 지보면 농협에 건립된 참기름공장을 취재했다. “가짜 예천 참기름이 나돌아 골치 아프다.”는 것이 이곳 주민들의 큰 걱정거리였다.
문제가 심각하다고 느낀 나는 점심을 먹고, 영주 봉화 등 경북북부 쪽으로 가려다 참기름에 대한 보완자료를 구하려고 예천군 공보실로 들어갔다. 갈 시간이 촉박하지도 않고 해서 직원들과 커피를 마시며 예천 양궁 이야기 등으로 환담을 나누었다. 이런 저런 이야기 끝에 한 직원이 불쑥 물었다.
“저 ! 김 기자 님 저런 것은 기사거리 안 됩니꺼. 나무가 장학금을 주게됐는데”...
“나무가 장학금을 주다니?
농담 잘 하시네”
“아 입니 더 참말이라요”
그 직원은 목청을 높이며 진짜가 맞다 고 우겼다.
‘이거 뭐 귀신 떡 갈라 먹는 이야기도 다 있네’... 입맛이 당겼다.
나는 곧바로 취재 차를 타고 직원의 안내를 받으며 그 쪽으로 달렸다. 비포장 농촌 길로 약 30분 거리. 먼지가 펑펑 날리는 논두렁길을 달리며 나는 다시 취재 차 박 기사에게 “재미있는 기사하나 취재 할 것 같네”라며 기대를 했다.
그러자 박 기사는 다짜고짜로“그건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머리를 저었다. 동승한 공보실 직원은 그저 빙그레 웃고만 있었다.
취재 차가 나무가 있다는 감천면 천향동 석평 마을 부근에 들어서자 마을 입구에 수 백년 묵은 소나무 한 그루가 웅장한 자태를 드러내 보였다.
동사무소에 들러 사연을 확인했더니 사실이었다. 나는 동서남북으로 각도를 바꿔가며 소나무사진을 찍는 등 신바람이 났다. 기자생활을 하는 동안 처음으로 찾아낸 ‘보석’같은 기사거리였기 때문이다. 콧노래가 절로 나왔다. 피로감도 어디론지 사라져버렸다. 우리는 가벼운 마음으로 다음 지역으로 향했다.
이렇게 취재된 ‘석송령’ 기사는 1985년 5월 22일자 서울신문에 사진과 함께 8단 BOX기사로 크게 보도되었다. 그리고 며칠 후 일본 산케이신문 ‘세계의 사회면’ TOP (昭和 60년 6월 7일자: 서울발 吉田 信行 특파원)으로 역시 ‘석송령’사진과 함께 보도 (서울신문 제공) 되어 세계적인 화제로 부각되었다. 뜻밖에 거머쥔 ‘석송령’ 기사, 그때의 서울신문 제목과 기사를 옮겨 본다.

재산을 가져 재산세를 무는 소나무가 이번에는 장학회를 만들었다. 경북예천군감천면 천향동에 있는 600년 묵은 소나무 석송령이 바로 그 주인공. 세금을 내는 나무로 이름이 알려진 석송령이 장학회를 만들게 된 것은 전두환 대통령이 이 나무보호를 위해 쓰라고 최근 금일봉을 보내온 것이 계기가 됐다.
대통령의 돈을 받은 예천군은 21일 소나무 보호는 군비와 주민의 협조로 하고 이 돈을 보다 뜻 있게 하기 위해 장학금으로 쓰기로 결정, 석송령 장학회를 만든 것이다.
장학회의 회장은 천향 동장인 김탁규 씨가 맡고 장학금은 내년 신학기부터 지급키로 했다. 이 장학금은 석송령의 고마움을 가까이서 보고 느낄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천향동 마을 중.고교생으로 제한했다.
예천군은 지난 3월 1백만 원 을 들여 석송령 둘레에 길이 1백20미터의 보호책을 설치하고 병충해 방제를 했다. 82년 11월 천연 기념물 294호로 지정된 600년 묵은 이 노송은 재산세를 무는 우리나라의 유일한 나무.
예천 에서 영주 쪽으로 가는 길목의 천향동 224번지 석평 마을(60가구)입구에 서 있는 이 노송의 이름은, 이 마을에서 오래 전 후손 없이 살던 이수목 이란 사람이 이 나무가 영험있는 나무라 보고 이름을 석송령 이라 지어 준 데서 유래 됐다. 이 씨는 그 뒤 1930년 임종 직전 자기의 재산 가운데 장례비로 쓰고 남은 것은 모두 이 소나무 앞으로 등기해 주라는 유언을 남기고 세상을 떠났다. 석송령은 이 때부터 이 씨가 남긴 천향동 804일대 토지 3천9백30m2의 땅 임자가 되어 재산세를 물었다.
지금 이 땅에는 1백50m2 짜리 농협창고와 마을회관(60m2), 주택5동이 들어서 있고 여기서(밭 9백m2 포함) 연간 20여 만원의 사용료수입을 올리고 있다. 지난해 감천면이 석송령에 부과한 재산세는 1만2천6백80원. 재산관리와 보호를 위해 이 마을 노인 유지 등 65명이 석송령 계를 조직, 매년 정월 14일 자시(하오11시~상오1시) 축관 제관 2명을 뽑고 마을 사람들과 함께 동신제(洞神祭)를 올려 마을의 안 태와 소나무의 안녕 을 빌고있다.
이 소나무가 이곳에 심어진 것은 6백여 년 전 마을 앞 석윤 천 상류인 풍기지방에서 홍수로 떠내려온 작은 소나무를 어느 농부가 영기가 서린 듯 하다면서 건져 심은 것이 잘 자라 오늘날까지 이어져 온 것으로 전해 지고있다. 그 뒤 이 나무는 더울 때는 시원한 정자가 되고, 마을의 풍년을 빌고 액운을 쫓는 수호신 노릇을 해오고 있다. 일제 때는 왜경이 미신으로 몰아 베어버리려고 이 마을로 오다 어귀에서 쓰러져 액운을 면하기도 했고, 6.25 때는 나무 밑에서 피난한 동민들은 모두 무사했다고 동민들은 전한다. 높이 10미터 밑 둘레4,2미터인 이 거목은 수형 폭이 동. 서로 32미터, 남북으로 22미터, 그늘 면적 만해도 930 m2 (3백평)이 넘는 초대형 우산모양. 마치 소나무 숲 같은 웅장한 자태를 하고 있다.
지난 73년에는 노령으로 가지의 무게를 견뎌내기가 어려울 것으로 보고 석송령 계에서 대리석과 철제로 된 받침대 18개를 괴었다.
82년에는 기력을 돋워주기 위해 나무 주위에 막걸리 10말을 붓기도 했다. < 醴泉= 金漢吉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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