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자 잡고 4시간 사투 끝에 산 50대여인

<22> 韓. 日 여객선 침몰 二題 

뉴스매거진 에서는 본사 김한길 논설주간 著 취재외길 오십년 <거지에서 대통령까지>중에서 뜻 있고 귀감이 될 만한 내용들을 발췌 정리해 연재한다. 일간지35년, 주간지 15년 등 장장 50년 동안 취재현장에서 체험한 생생한 이야기들이다. 독자여러분들의 기대와 성원을 바란다 <편집자>

칠흑 같은 바다 속에서 거친 파도와 4시간 여 동안 사투를 벌이며 구사일생(九死一生)으로 살아난 최옥화 씨(55:여. 제주도 북제주군구좌면 종달리). 부산에 사는 자식들을 보러오던 그는 악몽에서 깨어난 듯 소스라치며 말했다.
“배가 기우뚱하면서 갑판 위에 쌓였던 고기, 과일상자 등이 와르르 무너지고 순식간에 배는 기울기 시작했어요. 250여 승객들은 갑판 모서리에서, 바다 물 속에서 ‘마후라‘ 손수건 등에 불을 켜 들고 구조신호를 보냈고 와이셔츠 치마 닥치는 데로 찢어 태워 흔들며 ’사람 살려‘고 고함 쳤으나 구조의 손실은 닿지 않았어요. 아비규환 속에 얼마 안가 배는 침몰해 버렸어요.”
1971년 12월15일 오후3시 반 제주~부산 간 정기 여객선 남영호 침몰 대 참사 현장에서 살아난 생존자 중 제일먼저 부산으로 이송, 대교동 제일의원에 입원 중인 최 여인의 말이다.
당시 이 사건은 <동경 발 합동>으로 제1보가 타전됐다. -승객 257명을 태우고 제주를 떠나 부산으로 가던 정기여객선 남영호 가 15일 새벽 1시25분 대마도서쪽 100킬로미터 북위34도5분 동경128도5분 거제 동남 30마일 해상에서 전복 침몰되어 12명만이 구조되고 나머지 245명은 실종되었는데 이날 오전현재 모두 사망한 것으로 보인다....
이 사건은 조난 현장 부근에서 어로작업 중이던 일본 어선과 일본 해상보안청 순시선이 이를 목격, 승객 6명을 구조함으로서 알려졌다. 이 소식을 접한 우리 정부측은 -14일 오후 5시 제주 서귀포를 떠나 15일 오전 8시30분 부산에 도착할 예정이던 남영호 (362톤. 선원20명)가 이날 정오 현재 실종되었다고 밝혔다. 남영호 는 승객 등 모두 257명을 태우고 떠난 지 8시간만에 사고가 났다. 남영호 는 부산시충무동 3가 8 남영상선 (대표 서용득)소속으로 68년에 건조 됐으며 정원은 308명이다.
최 여인은 배가 침몰하기 1시간 전쯤 바람을 쏘일 겸 갑판 위에 나가 있었다. 그때 왼쪽 갑판 바닥에 물이 약간 넘치고 있었으나 ‘청소하려고 뿌린 물’인줄 알았다. 선원실 부근에서 약10분 동안 서있을 무렵 엔진이 멎어 면서 배가 갑자기 왼쪽으로 기우뚱했다. 전기 불이 꺼지고 사방은 깜깜해 져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배가 90도로 기울여 졌을 때 배 밑바닥을 잡고 늘어지며 위로 기어올랐다. 이때 초만원 객실에서 잠자다 깨어난 승객들이 허둥대기 시작했다. 단잠에서 깨어나지 못한 승객도 있었다. 정신 없이 바다에 나가떨어진 승객들은 가로 누워버린 배를 향해 소리소리 질렀다. 삽시간에 일대 아수라장이 되었다. 배가 넘어진 뒤 약10분, 배는 밑바닥을 하늘로 드러냈다.
그렇게 표류하고 있는 배 밑 바닥 쪽에 150여명이 서로 잡고 늘어져 ‘사람 살려’라고 목이 터져라 외쳤다. 그러나 큰 파도가 칠 때마다 30여명이 휩쓸려 나가버렸다. 다시 20여명이 바다 속으로 빠지고, 약 1시간을 표류하던 배마저 물 속으로 빠져 들어갔다. 마지막 남은 50여명도 배가 완전히 깔아 앉자 물 속으로 흩어져 들어가 버렸다. 마지막이다 고 여기고 무작정 2미터쯤 헤엄쳐 나갔을 때 눈앞에 조그마한 널판자가 보였다.
최씨는 이 판자에 목숨을 걸었다. 젊었을 때 해녀생활로 익힌 수영으로, 칠흑 같은 바다를 헤맨 지 4시간 여...먼동이 트였다. 새벽5시20분쯤 배 한 척이 보였다. 구사일생의 순간이었다. 어선 제 9 희영호 (50톤)였다. 이 어선은 동지나해에서 어로작업을 마치고 부산항으로 가던 중이었다.
나는 다시 중앙의원에 입원 중인 남영호 통신사 김혁기씨 (32)와 선장 강태수씨 등 생존자들을 만났다. 이들은 모두 밀감상자와 나무토막 등을 잡고 헤엄을 치기도 하면서 버텼다고 경위를 설명했다. 당국은 “ 정량보다 3배가 넘는 화물을 싣고 무리한 항해를 한 것과 무전기와 기관이 노후한 것이 사고 원인 인 것 같다”고 밝혔다. <부산서 본사 金漢吉 기자>

과적, 노후기관등이 사고원인
15일 이른 아침 나는 具球書 편집국장으로부터 긴급연락을 받고 버스 편으로 부산으로 달렸다. 외신뉴스로 타전된 사건을 구 국장이 먼저 알고 나에게 현장취재 지시를 한 것이다. 사고 선박 본사인 부산 충무동 남영상선 에 도착한 것은 이날 오전8시30분. 벌서 수 백 명의 가족들이 몰려와 땅을 치며 아우성이었다. 상선 측에서 사망자나 생존자 현황을 미처 다 파악하지 못한 시간이었다. 늑장 대응에 항의하는 고함소리도 터져 나왔다. 사망자 명단 등 사고현황을 취재하는 도중 생존자 1명이 이송돼 치료를 받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택시로 달려간 곳이 대교동 제일의원, 그 기에서 제일먼저 만나본 생존자가 최옥화 여인이다.
이렇게 숨가쁘게 달리고 뛰며 취재한 내용들을 정리해 본사로 전화 송 고 했다. 1면 TOP과 사회면 전면을 차지한, 우리나라 최대의 해난 참사 남영호 사건 보도(영남일보 1971년12월16일자)는 ‘가장 생생하고 앞선’ 기사였다 는 후 평을 받았다.
나는 다음날 유가족들의 오열소리를 뒤로하고 대구 본사로 돌아왔다. 이번 사건도 과적에 노후 기관 등 무리한 운항이 참사를 불렀다. 인간의 과욕, 사고불감증이 낸 인재 (人災)라는 점에서 안타까움이 더했다.
그로부터 35년이 흐른 지금, 무려 240여명을 삼킨 바다는 말이 없다. 다만 그때 현장을 취재한 한 노(老)기자가 그 당시를 회상하며 고인의 명복을 빌었다.

청진-敦賀간 일본 여객선 침몰 156명 사망
생존 독립투사 외아들 韓.日 ‘생존자 찾기 운동’
1979년 11월 초 한 50대 남자가 경북도청 기자실로 나를 찾아왔다. 38년 전 침몰한 일본 여객선 의 생존자 찾기 운동을 한. 일 공동으로 벌이고 있는데, 서울신문에 꼭 내야 고루 고루 전달이 잘 된다기에 여기까지 왔다는 것이다. 독립투사의 외아들이라는 그는 18세 때 아버지를 찾아 만주로 갔다가 찾질 못하고 방황하고 있던 중 이 여객선 승무원이 되어 일하다가 변을 당했으며, 그 때 승객 446명 중 156명이 익사하고 나머지는 실종 또는 생존했다는 사연이었다.
나는 의외의 호재라 여기면서 그를 조용한 지하 휴게실로 모셔 자초지종을 자세히 취재하고 소지하고있던 일본신문 보도내용과 자료 등을 받았다. ‘단독보도’라는 욕심 때문에 타사 기자들 몰래 바로 귀사 해 긴급 송고 했다. 다음날 지방 종합 판 TOP기사로 그의 사진과 침몰한 여객선, 일본신문 등이 자세히 보도됐다. 단독기사나 특종기사 가운데에는 이렇게 독자가 찾아오거나 연락을 해 취재되는 경우도 자주 있다.
다음은 1979년 11월 11일자 서울신문 보도 내용이다.
38년 전 침몰 여객선의 생존자를 찾는 운동이 한일 두 나라 관계자들 사이에 벌어지고 있다. 찾고있는 사람은 태평양전쟁이 일어나기 한달 전인 1941년 11월5일 기뢰에 맞아 침몰한 일본 여객선 氣比丸 (4천5백톤. 선장 上澤仲之助)의 한국인 생존승무원이었던 김봉년씨 (55. 서울 서대문구 불광동 280의811). 김 씨의 호소에 응해 협조하겠다고 나선 사람은 일본 敦賀시 시장 高木孝一씨.
김 씨는 지난 10월8일 이 여객선 소속 항이었던 돈하시 시장에게 ‘귀 시에 있는 기비신궁에서 순직자의 명복을 빌고 생존자들과 만나 당시의 감회를 나누고 싶다.’는 내용의 편지를 보냈다.
高木 시장은 ‘38년이라는 세월이 흘러 어려운 점이 많으나 최선을 다해 찾는데 협조하겠다.’는 정중한 회신을 보내왔다. 당시 생존자를 찾는다는 이 소식은 곧 일본전역의 신문. TV. 라디오 등에 보도됐다. 시장이 보낸 회신 중에는 ‘당시 숨진 승선자의 영혼이 잠든 氣比神宮은 2차 대전 때 모두 불탔었으나 지금은 다 복구되어 있다’는 내용도 적혀있었다.
당시 18세이던 김 씨는 만주에서 독립운동을 하고있다는 부모를 찾아 나섰다가 부모는 찾지 못하고 이 여객선 선장 눈에 들게됐다.
선장은 어린 김 소년을 양아들을 삼겠다며 정을 주었고, 조난 때까지 2년 여 동안 여객선 승무원 (기관 보조원)으로 일하게 됐다.
日本海의 여왕으로 불리던 이 여객선은 1941년(소화16년) 11월5일 승무원 89명, 승객3백57명 등 모두 4백46명을 싣고 청진항을 떠나 敦賀 항으로 가다 이날 밤 10시14분 소련제 기뢰에 받혀 30여분 뒤 침몰했다. 이때 승객1백36명. 승무원 20명 등 모두 1백56명이 희생됐다.
김 씨는 승객 20명, 승무원 10명과 함께 구명대를 타고 20 여 시간을 표류하던 끝에 7일 상오 8시 白山丸에 구조됐다. 공교롭게도 그 날은 김 씨의 생일이었다. 또 이 사건이 계기가 되어 그토록 그리던 부모를 찾았다. 신문에 난 조난자 명단을 본 부친이 밀사를 보낸 것이다. 김 씨는 그 후 광복군 3지대에서 복무하다 길림성에서 일본 관헌에 잡혀 장춘 형무소에서 복역하던 중 해방을 맞았다.
김 씨는 “죽음을 눈앞에 둔 갈림길에서 함께 살아 남은 사람들과 국경을 초월한 우의를 나누고 싶어 오랜 침묵을 깨고 생존자 찾기에 나서게됐다”고 이 운동을 편 동기를 말했다.
김 씨는 독립투사 김시현 옹과 권애라 씨 부부의 외아들이다. 가족으로는 부인과 2남2녀가 있으며 지금 사는 집은 지난 66년 1월3일 부친 金始顯 옹이 ‘셋방에서 여생을 마쳤다’는 보도를 본 朴正熙 대통령이 마련해 주신 것이라며 지난 10월26일 서거하신 박 대통령의 명복을 빌었다. *이후 이 운동 결과 등에 대한 내용은 서로 연락이 끊겨 알 수가 없었다. <大邱 金漢吉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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