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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에서 교훈을 얻지 못하는 국민은 미래가 없다‘뿌리감사 사명주의’, 민족적 직분사명주의 선언
  • 유희석 기자
  • 승인 2020.02.12 09:06
  • 호수 287
  • 댓글 0
법무법인 주원, 이건개 대표변호사

현재 우리사회를 예측할 수 없는 혼란·혼돈의 시대라고 진단하는 사회학자들이 적지 않다. 지금 겪고 있는 혼돈 가운데 가장 심각한 것 중의 하나가 양극화와 진영논리다. 이른바 한쪽 진영에 가담해 편싸움을 하듯이 수장만을 따라가는 정치시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특히 최근 온 나라를 뒤흔들어 놓은 ‘조국 사건’과 함께 찬반 국론 분열을 비롯해, 검찰개혁 및 공수처의 설치, 수사권의 조정 등 다양한 이슈들이 제기되고 있다. 검찰개혁의 필요성을 주장하는 입장과 현재의 시스템을 지지하는 입장에서의 논쟁도 끊이지 않고 있다.

특히 현 정부에서는 ‘경제·사회·문화 등 거의 모든 분야에서 검찰의 힘이 과도하다’고 주장하면서, 검찰의 공권력 남용을 막기 위해 ‘견제와 감시’ 시스템이 구축돼야 한다는 명분을 강조하고 나섰다. 그 결론과 목적은 궁극적으로 검찰 개혁이라 하는데, 이에 대한 국민들의 관심과 열기도 식지 않고 있다.

그렇다면 그간 우리 제도에서 쟁점이 되고 문제가 되었던 것은 무엇인가. 지난 정치사를 하나씩 짚어 보면서 어떻게 풀어가야 바람직한 것인지 분석하고 살펴보는 것이 필요하다.

따라서 본지에서는, 대한민국 역사 속에서 격랑의 시기를 헤쳐 나간 법조인이자, 또한 정치인으로서 자신만의 식견과 신념을 잃지 않고 임해 온, 이건개 변호사를 만나 과거사를 되짚어보며 자세한 이야기를 들어보았다.

역사의 변화기마다 확고한 신념과 철학으로 입장을 명백히 해왔던 이건개 변호사는, 먼저 “그동안 대통령과 핵심참모들이 독점권한에 도취되어 소통과 포용을 도외시하였기 때문에 역대 대통령들은 비극적 말로를 가져왔다”고 말문을 꺼내며, “이러한 원인은 제왕적 대통령 권한에 편승한 부패, 정상배의 농간과 부당 이윤 취득, 대기업들의 반(反)법치 행태 등이 벌어진 일로서, 대한민국이 올바르게 전진하려면 분권제가 실시돼야 한다”고 지적하고 제안했다. 특히 “지금 현실에서는 정당과 정파를 떠난 외교·안보·국방의 강화가 필요하다”고 강조하며, “정치인들은 당리당략, 입신양명, 대권욕심에서 벗어나 국민들에게 올바른 정신력을 불어넣는 역할이 중요하다”고 덧붙였다.

이어 “과거 우리 민족이 수많은 외침(外侵)을 받아왔던 것은 안보가 취약해서 발생했으며, 안보를 지키는 가장 중요한 수단은 ‘정신력’이며 이것이 없으면 국가는 사상누각에 불과하다”며, “지금 온 나라의 국론이 분열되고 있는 현실에서 국가의 안보를 위해서는 여야, 진보, 보수도 없다. 대한민국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모두 함께 뜻을 모아야한다”고 의지를 피력했다.

한편, 리더십과 추진력을 두루 갖추고, 국가의 안위와 올바른 기틀을 만드는데 심혈을 기울여온 이건개 변호사는 서울대학교 법학과를 졸업하고 1963년 제 1회 사법고시에 합격했으며, 미국 하버드대 법과대학원을 수료했다.

그는 만 30세에 최연소의 나이로 71년 故박정희 대통령에게 발탁돼 서울경찰청장에 임명됐으며, 故박정희 대통령부터 역대 대통령 6명을 가까이에서 보좌했던 우리나라 역사의 산증인으로서, 서울지검 검사, 서울경찰청장, 대검중앙수사부, 대검공안부장, 서울지검장, 대전고검장, 청와대 대통령비서실 사정담당비서관 등을 두루 거치며 국가의 치안과 안보에도 힘써왔다. 그리고 1995년 제15대 국회의원을 역임하면서 ‘최우수 국회의원’에 선정되기도 했으며, 현재 법무법인(유한) 주원의 대표 변호사이자 ‘나라미래준비모임’ 대표로서 ‘뿌리감사주의’를 통한 개혁운동을 전국적으로 전개 하고 있다.

2019년 10월 22일 서울 여의도 국회 의원회관에서 나라미래준비모임(대표 이건개 변호사)이 주최한 '투명·공정·정의로운 新질서 어떻게 만들 것인가' 라는 토론회에서 참석자들이 국민의례를 하고 있다.

‘뿌리감사 사명주의’ 바탕으로 위대한 대한민국 만들자

우리나라는 건국 100년이라는 시간동안 일제강점기, 독립운동, 6·25한국전쟁 및 분단, 산업화, 민주화를 차례로 거친 수많은 굴곡의 역사를 지난 나라이다. 지난 1905년 을사늑약을 기점으로 1910년 8월 29일 국권을 피탈당한 경술국치일, 1945년 8월 15일까지 일제의 식민통치 아래에서 우리 선조들이 겪어야 했던 나라를 잃은 서러움은 세계역사상 유례를 찾아볼 수 없이 비참하고 가혹했다.

그러나 우리의 선열들은 이에 굴하지 않고 국권회복을 위해 국내외에서 독립만세운동, 무장투쟁, 의열투쟁 등 다양한 방법을 동원해 끈질긴 독립운동을 전개했다.

그 결과 주권을 잃고 처절하게 몸부림쳤던 그 시절을 극복하고, 어느덧 3만 불 소득을 달성한 부강한 나라, 세계적으로 집중 받는 나라, 어려운 나라에 따뜻한 손길을 내미는 국가로 눈부신 성장을 이룩해 냈다. 지금 우리가 누리고 있는 자유와 평화, 경제적인 풍요는 일제에 맞서 싸운 선열들의 희생과 공헌이 없었더라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그러나 정부수립 이후, 세계의 어느 국가보다 비극적인 정권을 이어왔으며, 오늘날 국가의 생존을 확고히 지탱하는 선열들이 쌓아온 탑이 뿌리 채 흔들리고 있는 참담한 현실을 마주하고 있다. 이러한 현실에 대해 이건개 변호사는 ‘뿌리감사 사명주의’를 주창했다. “역사 속에서 깨달음을 받고 그 가운데 교훈을 얻는 국민과 국가만이 미래가 있는 것이고, 역사 속에 교훈을 소홀히 하는 국민은 미래가 없다”고 전하며, “우리는 왜 한일합병이 됐는지, 임진왜란, 6·25 전쟁이 왜 일어났는지 원인에 대해서 분석하고, 거기에서 역사적인 사실과 교훈을 깨달아야 된다. 또한 나라를 지키기 위해서 생명을 바친 선열들의 고귀한 희생과 숭고한 정신을 이어받고, 그분들이 지켜온 우리의 뿌리에 대한 감사를 느끼고 지켜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어 “그런 감사함 속에서 어떠한 국가를 세울 것인지 그에 대한 교훈과 청사진을 그리는 국민이 되어야 한다.

이것이 ‘뿌리감사 사명주의’로서, 지금까지 우리 대한민국의 뿌리를 지켜온 선열들에게 고마움을 느끼고 ‘뿌리감사 사명주의’의 정신 아래, 이제는 대한민국이 전 세계 역사를 주도하는 위대한 대한민국을 만들어야 한다”고 깊은 뜻을 내비쳤다. 특히 이 변호사는 “우리는 지난 정권의 잘못된 점에 대해 비판하면서도 배울 것은 배워야 하며, 또 역사 속에서 교훈을 깨닫기 위해서는 독서하는 국민이 되어야 할 것”이라고 전하며, “전 세계에서 독서 많이 하는 국민은 영국, 프랑스, 독일, 미국, 일본 등 선진 5개국이 독서를 가장 많이 하는 나라이다. 독서를 통해서 인간가치의 존엄성을 확립하기 위한 법치(法治)의 중요성을 깨닫는다면, 법치를 바탕으로 한 첨단 질서를 확립하고 인간의 창의성을 무한히 발휘할 수 있기 때문에 무한대의 경제도약이 가능할 수 있다”고 청사진을 제시했다.

그러나 이는 대통령 심기에 따른 ‘위로부터의 법치’가 아니라 ‘밑으로부터의 법치’로 개혁되어야 하며, “지금 당장 눈앞의 이해관계 보다는 큰 밑그림을 제대로 그릴 수 있는 안목이 필요하다”고 전했다.

또한 “최소한 국가 속에서 억울하고 고통 받는 사람들이 없어야 한다. 이와 같은 사람들이 없는 질서로의 개혁, 희망과 미래의 밝은 빛을 주는 정신질서 개혁, ‘뿌리감사사명주의’, ‘민족적 직분사명주의’로서 개혁이 중요하다.

청소년 세대에 꿈과 희망을 주는 질서로 개혁하고 청년취업 100% 해결, 이념에 대한 방향 제시, 우주의 원리에 대한 의식 정립을 해야 할 것”이라고 방법을 제시했다.

그러나 “시민의 의무와 권리에 대한 직분사명주의, 직분과 중용, 선 의무 수행 후 권리행사를 하도록 해야 한다”며, “법치와 함께 국가의 뿌리를 튼튼하게 하기 위한 ‘뿌리감사 사명주의’ 없이는 대한민국 발전은 더뎌질 수밖에 없다.”며 필요성에 대해 역설했다.

즉, 우리의 비극적인 역사를 돌아봄으로서 원인을 찾아서 분석하고, 그를 통해 개혁해야 새로운 성장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위대한 대한민국이 되기 위한 시대정신과, 정의로운 국가로의 회귀를 위한 역사적 ‘뿌리감사 사명주의’를 강조하고 있는 이 변호사의 목소리에 우리 모두가 귀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 이와 함께 국가기강을 바로잡아 투명한 사회, 굳은 뿌리를 갖춘 국가의 근간을 확실히 정립하고 개혁할 필요성이 절실한 때이다.

지난 1월 8일 나라미래준비모임(대표 이건개 변호사)회원 등 약 200여명이 ‘위대한 대한민국 만들기’ 위한 행사로서 현충원을 참배했다.

특정제도나 권력을 비호하는 검찰개혁이 되어서는 안 된다

검찰개혁에 관한 논의는 역대 정부가 출범할 때마다 제기됐지만, 이번처럼 정치적 의지가 확고하고 국민관심도가 높은 적은 없었다. 개혁을 논하기 이전에 먼저 검찰이 탄생하게 된 배경을 찾아보자. 프랑스 시민혁명 이후 권력분립주의의 영향으로 행정권과 사법권이 분리되기 시작했다. 경찰은 질서유지 및 치안을, 법원은 형사절차와 수사·재판 및 형의 집행을 담당했다.

그러나 경찰의 권한은 실제로 법원을 압도해 남용의 문제가 발생했으며, 법원의 역할도 너무 광범위했다.

따라서 이를 견제하고 조정하기 위해 경찰과 법원의 권한 일부를 떼어 합친 검찰이 탄생하게 된다. 그러나 집중된 권력을 견제하고 인권을 보호하기 위해 탄생한 검찰은 아이러니하게도 오늘날 권력의 아이콘으로 자리 잡았으며, 오히려 견제의 대상이 되고 있다.

검찰의 정치권력 개입은 권력의 칼로 만든 원인으로서, 역대 정부의 검찰 바로세우기는 성공하지 못했다. 근본적인 이유는 날이 선 칼을 다른 사람이 가지고 있을 때는 개혁을 외치지만, 정작 정치적 승리를 거머쥐었을 때는 자신을 지키는 든든한 무기로 사용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정치권력의 칼이 되고, 비리의 당사자가 되는 일이 시스템의 문제인지 개인의 문제인지가 여부이다. 특히 개혁이란, 개혁주체의 도덕성이 중요하고, 그 과정의 투명성이 담보되어야 한다. 그러나 문제는 향후 국정운영을 둘러싼 진영 간 싸움이 되어가고 있다는 점이다. 한쪽에서는 나라가 무너질 것을 염려하고, 다른 한쪽에서는 ‘모든 게 야당 탓’일 정도로 정치적 양극화가 극심해진 상황이 전개되고 있다.

또한 현 국면은 향후 국정운영과 사법개혁의 성패를 좌우할 분기점이라는 것이다. 여야 모두 검찰 개혁의 당위성에 대해서는 인정하고 있지만 세부 방안에서 첨예하게 대립을 하고 있다. 여기서 법률가로서의 소신과 원칙을 갖고 직분사명 수행에 힘써왔던 이건개 변호사는 ‘직분사명주의’를 강조했다. “검찰개혁의 핵심은 청와대와 정치권으로부터의 독립”이라고 말하며, 특히 “청와대나 정치권을 수사할 때, 자신들의 입맛에 맞춰서 검찰을 좌지우지 한다는 것은 역사적 심판을 받을 가능성이 많다”고 우려를 표명했다.

이어 “우리 국민에게는 ‘직분사명주의’가 필요하다”고 강조하며, “직분이라는 것은 나도 평소에 생각했지만 서울대학교 이한영 교수가 주장한 내용으로서, 권리행사에는 필히 의무책임을 져야 한다. 의무를 책임지지 않고 권리만 내세우고 행사를 해서는 안 된다. 먼저 법을 지키고 의무를 지키면서 권리를 행사해야지 권한남용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단호하게 말했다. 따라서 청와대는 검찰의 개별사건 수사에 대해서 구속, 불구속 특별지시를 하면 안 되며, 만약 이를 어기면 직분사명주의에 반하게 된다.

한편, 이건개 변호사는 ‘대통령제가 죽어야 나라가 산다’, ‘역대 정권의 병폐와 새로운 한국의 길’, 포퓰리즘은 죽어야 한다' 등의 책을 통해 “역대 정권에서 병폐 원인의 90% 이상이 대통령 1인 독점 권한에 있었다”고 대통령제의 폐해를 지적했다. 이를 통해 역대 정권의 각종 병폐를 분석한 다음 분권형 대통령제 개헌 및 새로운 대안을 제시하기도 했다.

현충원에서 참배하는 이건개 변호사.

대통령에게 직언을 아끼지 않았던 젊은 인재

이제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만 30세의 나이로 서울시경 경찰청장으로 발탁되었고, 과거 6인의 대통령을 겪은 장본인이자, 청와대 사정담당비서관을 신설하고, 대검찰청 중앙수사부를 발족했으며, 공안합수부를 설립·지휘하면서 권력의 속성과 병폐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이건개 변호사의 발자취를 따라 역사현장 속으로 들어가 살펴보기로 한다. 사법대학원(현 사법연수원)에서 공동수석으로 졸업해 법무부장관상을 수상하는 영예를 안고 졸업한 이건개 변호사는, 당시 영미법 과목에서도 최고 점수를 받아 미국 대사상을 수상한 뛰어난 재원이었다.

그리고 사법대학원을 졸업한 후에는 수색에 있는 3사단에서 군 법무관 훈련을 받았고 육군 중위로 임관했다.

군 복무를 마친 후에는 서울지검 검사로 발령을 받아 검사로서 첫 근무를 시작했다. 그때가 1966년 4월이었다.

초임 검사시절에 그는 주로 인지사건 수사를 담당, 스스로 정보를 입수해 그 누구보다도 적극적으로 수사에 임했다. 그러나 더 큰 발전을 위해 검사로서의 생활을 잠시 접고 미국유학을 결심, 토플시험을 치렀는데 우수한 성적을 받아 예일 대학으로부터 장학금을 받을 수 있었다.

그는 1969년 5월, 법무부에 출국신고를 마치고 미국으로 떠날 준비를 하던 중, “젊은 인재가 필요하다”는 故박정희 대통령의 요청으로 청와대 민정비서실에 파견검사로 출근하게 된다. 특히 故박정희 대통령이 특별히 아끼는 인재로서 “젊은 사람인 자네가 세상을 정확하게 파악하고 잘못 된 점이 있다면 내게 쓴 소리를 아끼지 말라”는 부탁으로, 틈틈이 대통령을 만나 구두 및 서면보고를 하면서 故박 대통령의 면전에서 직언을 아끼지 않았다.

故박정희 대통령은 민정비서실을 통해 직접 국민의 어려움과 고충을 보고받아 해결했고, 그 중에서도 행정부의 시책이 정확하게 일선에 집행되는지 정밀하게 점검했다.

한편, 1969년에는 태풍이 전국을 강타해 특히 경남 일대에 피해가 막심했다. 당시 故박정희 대통령은 민정비서관에게 암행반 편성을 지시했는데, 그도 암행반의 구성원이 되어 경남과 부산 일대의 태풍피해 이재민들에게 생활보조금과 보상금이 제대로 지급되고 있는지, 현지 공무원들이 복구 작업에 필요한 지원을 제대로 하고 있는지, 이재민의 불만은 무엇인지 알아보고 그 지역의 민심을 비밀리에 파악해 대통령에게 보고하는 대활약을 하기도 했다.

그리고 1969년부터 1971년 초까지 민정비서실에 근무하다가 정무비서실 기획실로 자리를 옮겼다.

정무비서실 기획실은 정부의 주요 정책을 총괄해서 계획적으로 추진하고 긴밀하게 협조·조정·통제하기 위해 대통령의 특별지시로 창설되었다.

그는 기획실에서는 문제가 된 현안을 분석하여 대책방안을 강구하고 보고서를 작성해 대통령에게 보고하는 일을 맡았다. 이를 위해 주변의 여론 형성층과 교수 등, 각계의 지식인들과 많은 것을 논의했고, 국가운영의 문제점들에 대해 심층 깊게 논의해 대책방안을 강구했다. 그렇게 연구 분석한 자료를 토대로 ‘청년의 문제점, 현 정책의 허실과 핵심 대책방안’이라는 보고서를 작성해 극찬을 받기도 했다.

물론 당시에 대통령의 지시가 제일 중요하기도 했지만, 그는 법률적으로 판단했을 때 죄가 되지 않거나 구속 사유에 해당되지 않는 경미한 사안으로 사람을 구속하려고 했을 때는, 대통령이 올바른 판단을 할 수 있도록 충언을 아끼지 않았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그 중에서 괄목할만한 성과는 故박 대통령에게 “돈 없는 사람들은 민사사건에서 변호사를 선임할 수 없으니, 가난한 사람들을 도와주는 법률구조를 지시하시는 것이 어떻겠느냐”는 제안을 해서, 무료법률구조공단 설립을 추진하게 했던 의인이기도 했다.

30세의 나이로 서울시경국장(현 서울지방경찰청장)에 임명된 이건개 변호사

청와대 사정실(司正室) 창설

1970년에는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춘천고등학교에서 있던 대통령 선거 연설 당시, 김대중 후보의 연설과 보조 연설로 김영삼 등 몇 몇 정치인의 연설이 있었다. 그런데 학교 운동장을 꽉 채운 인파속에서 유독 눈에 띄는 연설자가 있었다. 바로 故김대중 전 대통령이었다.

연설이 있었던 다음날 아침, 청와대에서 박정희 대통령 내외분과 식사를 하던 자리에서 그는 “건국이후 대중연설가로는 강원룡 목사와 김대중 후보를 따를 자가 없을 것입니다. 특히 김대중 후보는 감동적인 연설로 청중을 휘어잡아 저도 감명을 받을 정도였습니다.”라고 보고했다.

그 당시 대통령에게 쓴소리를 한다는 것은 상당한 용기를 필요로 하는 그런 시기였다. 더구나 대통령선거로 민감한 시점에서 야당 후보인 김대중의 연설에 대해 가감 없이 칭찬을 하는 그를 보면서 옆에 있는 비서진들은 경직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조금도 망설이거나 감추지 않고 발언하는 이건개 비서관에게 박정희 대통령은 신선한 감흥을 받았다. 그 후 그는 박대통령의 각별한 신임 속에서 검사로서 청와대에 파견되어 비서실을 순회했다.

정보비시설에선 암행감사반으로 활동을 했고, 공보비서실에선 청와대 홍보와 공보에 힘써왔다.

또한 부정부패를 일소하겠다는 일념으로 그 의지를 증명하는 기구인 ‘사정담당 특별보좌관실’의 창설안을 상세히 만들어 대통령 제1부속실을 통해 대통령께 올렸다.

아울러 “그 명칭은 ‘호민(護民) 담당 특별보좌관실’이 이미지 상 더 좋을 것 같다”고 제안했다. 상세히 보고받은 故박 통령은 당장 실행에 옮기라는 지시를 했다. 그는 사정담당 특별보좌관실의 창설 작업 및 세부 시행지침도 작성했고 대선이 끝난 후, 초대 사정담당 특별보좌관실의 사정비서관으로 발령받아 사정 업무를 시작했다.

이와 함께 젊은 세대의 국가 경영능력 배양을 위해 청년담당비서실을 신설해 각 분야의 젊은 사람 약 500명의 인재를 발굴 관리했다. 이후 경찰총수를 마치고 하버드대학원에 1년간 유학을 가게 되는데, 이곳에서 wagner교수는‘세계 역사 속에서 하극상을 일으켜 정권을 찬탈하고 집권하는 경우가 가장 많은 국가가 아마 한반도일 것이다“라는 강의를 듣게 된다.

이에 이건개 변호사는 동의 할 수 없다며 즉시 반박을 하였지만 지금 정치상황에서 돌이켜보면 그 말이 맞는 것을 알게 되었다고 회고한다.

제15대 국회 3번의 청문회에서 스타위원으로 활동한 이건개 변호사.

수도경찰·수도검찰총수로서의 사명

1968년 1월21일 북한의 특수훈련을 받은 게릴라들이 청와대를 습격하는 이른바 1·21사태가 발발했다. 북한의 게릴라들은 1월19일 밤 서부전선의 미군 군사지역과 임진강을 건넌 후, 파주 삼봉산을 거쳐 21일 서울 시내 세검동파출소 관할 자하문 초소에 이르게 된다. 이 초소에서 경찰관의 첫 검문을 받게 되자, 일당은“방첩대원들이다. 신분증은 볼 필요가 없다, 우리 부대로 가자” 등 위협적인 언사를 서슴지 않자 경찰관들이 당황하여 조치를 제대로 취하지 못하게 된다. 이후 연락을 받고 출동한 경찰과 접전이 벌어지면서 현장을 지휘하던 최규식 종로경찰서장이 전사하고, 경찰관 2명이 중상을 입게 된다. 이때부터 게릴라들이 지나던 버스에 수류탄을 투척하는 등, 만행을 저지르며, 민간인 5명이 살해된다.

군경합동수색진은 소탕전을 펼쳐 31일까지 28명을 사살하고 김신조를 생포하였으며, 나머지 2명은 도주하면서 작전은 종료되었다. 이 사건을 계기로 정부는 북한의 비정규전에 대비하기 위한 향토예비군 창설을 하게 된다.

또한 故박정희 대통령은 우리 치안의 문제점과 경찰조직에 원칙적인 업무수행의 자세를 심기 위하여 어떠한 인맥에도 연계되지 아니한 젊은 사람이 필요하다고 생각하게 된다. 1971년 12월 11일 당시 김현옥 내무부장관이 추천한 ‘3인의 젊은 인재’ 중 만 30세의 젊은 이건개 검사가 수도경찰 총수로 발령을 받는다. 그러한 故박 대통령의 뜻에 부응하고, 그 직분에 최대한 충실하기 위해 그는 경찰의 원칙적인 업무집행을 고취했고, 지휘고하를 막론하고 법 앞에 공평한 행정을 펼치기 위해 부단한 노력을 경주하며 수많은 수훈을 세웠다.

그 중에서 몇 가지를 살펴보면, 수도치안비상조치 1, 2호를 발표하면서 치안공백을 최소화 하였고, ‘330수사대’와 ‘기동순찰대’를 창설해 민생보호에 적극적으로 나서게 된다.

‘330수사대’는 야간주거침입죄와 절도죄의 형법 330조에서 기인한 것으로, 그 당시 어려운 경제상황에서 주거침입에 의한 절도가 기승을 부리고 있었다. 이를 뿌리 뽑기 위해 그동안 경찰에서 했던 것처럼 단순 절도범을 검거하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장물을 취급하는 선까지 수사를 하면서 떼 절도를 발본색원 하는 등, 조직적인 도범을 일소하게 된다. 그리고 현장을 직접 뛰는 도보 순찰제를 현실화시켰으며, 경찰의 정보기능을 만든 것을 계기로 범죄정보 수집기능과 수사관 교육기능, 거짓말탐지기 등 첨단과학수사 장비를 갖추게 하여 그 당시 창궐하던 야간절도와 강력범의 빈도를 현격히 줄였다.

또한 경찰예산으로 일선 경찰관 중심의 집행체제를 확립하여 경찰공무원의 사기를 진작시켰고, 당시 ‘백차’라고 불리던 경찰 순찰차의 도색을 청백색도장으로 제도개선을 하는 등, 대한민국의 경찰 역사상 가장 획기적인 조치들의 단행으로 강력하고 기획적인 수도치안을 확립했다. 뿐만 아니라 용감한 시민상을 창설하여 시민들과 적극적인 소통을 이루는 등의 노력으로 그의 임기 중에는 단 한 건의 불법시위도 없었으며, 국가기강이 추상같이 확립되어 경제도약의 기초가 되었다. 국가기강이 서야 경제 도약이 될 수있는 것이다.

당시의 제도나 조치들은 지금까지도 대부분 유지·시행되고 있다. 또 한 가지의 수행해왔던 일은, 故박 대통령에게 일주일에 한 번 정도 전반적인 여론과 정권이 비판을 받는 문제점들을 광범위하게 보고를 드리는 일이었다.

육영수 여사 역시 “나이든 참모들이 여기저기 얽혀서 ‘쓴 소리’를 하지 않는다.”고 하면서 “그와 같은 보고를 대통령께 많이 해드리는 일에 힘써 달라”고 간곡히 부탁하곤 했다. 이와 같은 민생치안의 주력과 ‘민의가 국가경영의 일선에 전달되게 해야 한다’는 사명감으로 수도경찰 총수의 직분을 수행했으며, 서울검사장 재직시는 무엇보다도 ‘믿고 살 수 있는 사회’를 만들기 위해 사기사범 등 ‘反 신뢰사범’ 일소를 위해, 수도권 전체와 대한민국 전체의 범죄현장을 심층 분석하여 기획수사의 방향으로 수도검찰을 지휘했다. 1974년에는 안타깝게도 ‘육영수 여사 피살사건’을 맞게 되었고, 그는 ‘합동수사본부’ 부본부장이 되어 이 역사적 사건의 수사에 관여하게 됐다.

육영수 여사 사건의 합수부의 경우, “정확한 조사를 위해서는 시간이 더 필요한데 문세광의 사형집행이 너무 빠르게 진행됐다”고 회고한다. 특히 육 여사 피살사건은 故박 대통령을 변하게 만들었다. 경호실의 영향력이 커지면서 차지철의 등장을 가져왔고, 이것은 결과적으로 10·26 사건을 촉발시키는 원인으로 작용하게 된다. 5년 뒤인 1979년 10월 27일 아침 일찍, 이건개 대검찰청 연구관 집에 전두환 보안사령관이 전화를 걸어왔다. 이미 그는 여러 경로를 통해 박 대통령이 전날 밤 서거한 것을 알고 있었다.

그는 보안사를 찾아가 전두환 사령관을 만났다.

전 사령관은 그에게 도움을 요청하였고, 그 자리에서 검찰총장에게 전화를 걸어 파견요청을 했다. 이렇게 되어 그는 전두환 합동수사본부 파견검사로서, 10월 27일 오후 궁정동 현장을 확인·답사하고, 노재현 국방장관, 전두환 보안사령관과 협의를 거쳐 합수부 수사발표문을 최종적으로 만든다. 합수부에 파견 나갔던 그는 12·12사건 후 검찰로 돌아왔다. 그가 육 여사 피살사건의 수사에 이어 박정희 대통령 시해사건의 수사에 관여하게 된 것은, 박정희家와는 선친인 이용문 장군 때부터 이어온 숙명적 인연이 있었다고 생각한다. 한편 김재규 사건 합수부 때, 일각에서 전두환 사령관에 대한 권력지향적인 부분에 대해, 이건개 검사는 전두환 사령관에게 ‘軍은 중립을 지키게 하고 정치는 정당끼리 싸우게 하자’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당시 일본에서 온 H모씨가 전두환 사령관에게 “당신이 대통령을 하라”고 권유해 그는 이를 강하게 만류하기도 하였다.

이건개 변호사는 “법률가로서의 소신과 원칙을 가지고 직분사명의 수행에 힘썼던 수도경찰과 검찰의 총수시절은 국가의 모든 법과 행정이 국민을 위해 존재해야 한다는 평범한 진리를 깨닫는 소중한 경험이 아닐 수 없었다”고 당시를 회고했다.

시경국장 재임 시 발생한 대연각호텔 화재진압을 지휘 중인 이건개 변호사.

대검(大檢) 중수부, 민생합수부, 공안합수부 창설자

1980년대 후반 무렵, 당시 오탁근(吳鐸根) 법무부장관(검찰총장 역임)과 전국부장검사회의를 하던 중, “검찰을 개혁할 것이 없느냐”는 질문을 받았다.

그는 “지금의 검찰수사는 코끼리 뒷다리 만지듯이 단편적인데, 대검찰청 특별수사부를 범죄정보를 분석하고 정보기능을 강화하여 체계적 네트워크를 형성하는 전국단위의 수사기관으로 만들어야 하고, 이름을 ‘대검 중앙수사부’로 하는 것이 좋겠다”고 제안 했다.

그 후 대검 중앙수사부는 굵직굵직한 사건들을 맡게 되었고, 명실공이 최고의 수사기관으로 자리매김하게 된다.

뿐만 아니라 일반 서민들의 국민생활에 직결되는 민생 및 애로사항을 담당하는 ‘민생합수부’ 역시 이건개 검사장의 작품이다. 한편 1989년 그가 대검 공안부장 시절, 부산에서 근로자들이 사장을 드럼통에 가둬 굴리고 린치 한 사건이 발생했다. 치안확보를 위해 경찰력으로는 한계를 느꼈다. 그는 그 사건을 기억하고 치안확보를 위해 경찰, 검찰, 중앙정보부를 합친 ‘공안합동수사본부’가 설치되었으며 초대 본부장을 맡게 된다. 그가 역대 대통령과 함께 하면서 걸어왔던 길은 도전과 개척의 역사였으며 그가 남긴 발자취는 역사의 한 장으로서 아직까지도 오롯이 남아 있다.

공안합수부 본부장으로서 노사문제를 선동하는 세력을 척결하였고, 침투된 간첩들을 검거해서 공안질서를 완전히 평정했다. 그러나 정치권에 침투한 간첩을 검거하기 위해 수사를 하는 가운데, 국회에서 정치인들이 공안합수부 해체를 주장하고 나섰다. 정치인들의 당리당략에 따른 이해관계가 우선되어 그는 끝까지 반대했지만 결국은 정치인들에 의해 반 년 만에 해체되고 말았다.

그 뒤 문민정부는 대통령 취임사에서 우리민족 우선을 내세워 1993년 3월 미전향 장기수 이인모(李仁模)를 북으로 돌려보냈고, 검찰, 경찰, 중앙정보부의 공안기능을 대폭 약화시켰으며, 경찰 대공부서를 폐쇄했다.

그 때부터 대한한국 역사에서 간첩 잡는 대공 기능이 크게 약화되었다. 1992~1993년 수도검찰 총수인 서울지검장 시절에는 수도권 전체와 대한민국 전체의 범죄현장을 심층 분석해 기획수사의 방향으로 수도검찰을 지휘하면서, 국가경제사범 수사에 있어서도 다음과 같은 기준을 지킬 것을 원칙으로 했다.

첫째, 국가경제 전체에 미치는 영향을 분석해 수사시기의 우선순위를 결정하라.

둘째, 포퓰리즘에 빠져서 마녀사냥 식으로 수사하지 말라.

셋째, 수사 시작부터 피의사실을 공표해 여론에 선입견을 주어 여론에 쫓기는 수사를 하지 말라. 이와 같은 수사원칙은 임기 중 철저히 지켜 나갔고, 피의사실을 공표한 검사나 수사공무원의 징계를 원칙으로 했다.

이건개 변호사가 검찰의 간부로 있을 때, 그 당시의 사례 하나를 찾아보기로 했다. 어떤 중진 국회의원에 대한 투서 사건을 조사했던 일이다. 그 당시, 청와대로부터 구속수사를 해야 한다는 강력한 특명이 내려왔다. 그러나 그는 그 사람의 행위가 도덕적 비난을 받을 만한 일도 아니었고, 아무리 신문에 크게 보도되었다 하더라도 구속할만한 법률적 위반이 아니라고 강력하게 주장했다.

구속은 물론 입건도 할 수 없다고 했다. 그러자 일부에서 가택수색을 하자고 제안했고, 가택수색을 하던 중에 그의 집에서 권총이 발견됐다. 그것을 빌미로 또 다시 그 국회의원을 구속하라는 지시가 내려왔지만, 그는 “그렇게 하는 것은 공정한 수사방법이 아니기 때문에 구속할 수 없다”고 주장하면서, “주임검사를 바꿔주던지 아니면 이 사건에서 자신을 빼주던지 하라”고 상부에 강력히 건의했다.

다행이 그 당시 검찰총장은 그의 의견을 받아들여 그를 입건하지 않고 이건개 부장검사 의견대로 내사종결 하였다. 일련의 사건 외에도 그는 ‘믿고 살 수 있는 사회’를 만들기 위해 공정한 사회가 이뤄질 수 있도록 검찰권을 올바르게 행사했다.

그 시절, 당시 청와대의 불필요한 간섭과 부당한 인신구속의 특명들이 여러 건 있었으나, 원칙에 따른 ‘검찰권 행사로 청와대의 특정인 구속 특별지시를 거부했기 때문에 정치탄압의 굴레를 쓰기도 했다.

한편, 많은 사람들이 공직에 있을 때만 국가에 대해 주인의식을 강조하고, 공직을 떠나는 순간 주인의식을 내던지고 있다. 그러나 이건개 변호사는 1995년 8월 15일 올바른 나라의 틀을 후손에게 물려주고, 국가경영의 방향을 국가안보와 국가경제 도약에 맞춰야 한다는 취지로 ‘나라미래 준비모임’을 창립해 지금까지 25년간을 운영해 오고 있다.

6.25 전쟁 당시 수도고지탈환작전 등 많은 훈장을 받은 이용문 장군의 무훈을 설명하는 이건개 변호사. (왼쪽부터 무공포장, 충무무공훈장, 태극무공훈장, 을지무공훈장, 화랑무공훈장)

국회시절 고통받는 국민을 돕기 위한 활동에 앞장서...

이건개 변호사는 자유민주연합 소속 제15대 국회의원 시절, 국회통일외무위원회와 국회제도개선특별위원회의 간사위원으로 활동하였다. 특히 여야 국회의원 30여명을 규합하여 국회 의정연구모임인「고통받는사람들을위한협력제도연구모임」을 발족하고 모임의 대표로서 정치적 억압으로 억울하게 고통을 받거나 잘못된 수사나 행정규제조치로 피해를 본 사람, 국민생활과 직결된 생활입법이나 제도의 미흡으로 고통을 당한 사람 등 ‘고통 받는 사람들’을 구제하기 위해 ‘국민생존위해고통처리에관한기본법’ 제정 등 200여건의 법률안 입법과 관련된 활동으로 의정연수원이 시상하는 우수 연구단체에 매년 선정된바 있다.

‘미투’ 문제를 그 당시 이미 다루었고, 중국동포 산업연수생사건과 노숙자 보호 등 관련 입법에 앞장섰다. 더불어 강릉무장공비사건 당시 억울하게 탈영 처리된 某 장병의 명예회복과, 일본에 장기 수감되었던 재일동포 김희로(본명,권희로) 석방 및 국내정착을 성사 시키는 등 법률 사각지대에서 고통 받는 국민들을 돕기 위한 활동에 앞장선바 있다.

분권과 균형으로 국가질서 확립해야....

권력이 과대하게 집중되면 ‘일하는 대통령’이 아닌 말만 하는 대통령이 될 수 있다. 또한 대통령의 막강한 권한을 뒷받침하기 위해 역대 정권은 청와대의 기능을 계속 강화해왔고, 그로 인해 청와대는 불필요하게 국정 전반을 간섭하는 옥상옥(屋上屋)이 되어왔다.

“국가 권력이 대통령 1인에게 치중되는 구조가 계속 유지되고 있는 상황에서는 본질적으로 발전적인 체제 개선을 기대하기 어렵다. 특히 똑같은 사안에 대해 정반대의 결정을 내리는 사태가 발생하는 국가 운영은 시대에 뒤떨어진 전근대적인 것으로 밖에 설명될 수 없다”고 이건개 변호사는 주장한다. 또한 “국가가 건전하게 발전하면서 전문성과 정확성을 가지고 효율적으로 국가 업무를 수행하기 위해서는 정권과 청와대로부터 독립된 직업공무원 체제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아울러 “방대한 권한이 대통령에게 집중되어 있는 경우에는 청와대 비서실의 기능이 비대해지지 않을 수 없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직업공무원들은 대통령비서실만 쳐다보는 구경꾼의 입장으로 전락해 국정을 방관하는 자세를 취할 가능성이 매우 높다.”고 말하며, “이는 그동안의 경험으로 미루어 불 때 충분히 가능한 일”이라고 분석했다.

지나친 권력은 권력의 남용을 수반하기 마련이고, 이는 곧바로 인권침해라는 결과를 낳게 된다. 어떤 행위에 대해 철저한 조사를 하기 이전에 권력의 마음에 들이 않으면 힘으로 눌러버리는 전형적인 인권침해의 모습이 나타나는 것이다. 사실 ‘정치를 한다’는 말은 현재 부정적 이미지로 덧씌워져 있지만 대의를 위한 ‘정치하는 일’만큼 귀중한 일이 없다.

문제는 정치 참여가 아무리 활발하다 하더라도 이것이 진영논리에 의한 정치포로가 되면 이성적 분별력을 잃고 만다. 또한 진영의 벽을 부수는 통합의 정치보다 지지층만 보고 하는 정치는 민주화 이후 대한민국 정치에도 고질병이 되고 있다. 이 문제는 보수와 진보 정권을 막론한 현상이지만 현 정권에서 이는 유독 심해졌다.

선친 이용문 장군과 모친 김정자 여사.

이러한 현상 때문에 지금의 대한민국은 소중한 가치들이 혼돈에 휩싸이고, 그 빛을 잃어가고 있다.

여기에서 이건개 변호사가 주장하는 ‘뿌리감사 사명주의’에 대해서 다시 한 번 생각해보지 않을 수가 없다. 또한 ‘횃불사명주의’라는 석사학위논문 ‘대통령중심제’에서는, 신 대통령중심제를 표방해 향후 우리나라가 대통령의 권한을 대폭 축소한 분권제로 가는 것을 골자로 하고 있다.

이로써 ‘우리는 인권침해, 권력독점 질서가 아닌 분권과 균형의 국가권력 질서를 한반도 통일국가의 기본정책으로 해야 할 것이라는 제안서’이기도 하다.

리더십과 덕망을 갖추고 오랫동안 법조계에서 자리매김했을 뿐 아니라, 국회의원으로서도 열정적으로 활동한 이력을 갖고 있는 이건개 변호사는, 무슨 일을 하던지 선봉에 서서 국가를 위해 크게 이바지 하고 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6명의 대통령을 보좌하면서도 역사의 변화기마다 옳은 방향으로 입장을 명백히 밝혀온 이건개 변호사는 고난과 역경에 맞서는 두둑한 배짱과 추진력, 그리고 끝없는 도전을 가능케 하는 ‘열정의 에너지’라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끝으로 “그동안 제가 살아왔던 것처럼, 바른 일에는 소신을 굽히지 않는 태도로 일관한다면 국가의 위기도 잘 해결할 수 있을 거라고 믿는다.”며, “‘뿌리감사 사명주의’를 바탕으로 국가의 안위와 올바른 기틀을 만드는데 온 힘을 다할 것”이라고 이건개 변호사는 약속했다.

지난 격동기의 발자국을 분석하고 그것을 버팀목을 삼아 보다 발전적인 미래를 열기 위해 견인차 역할을 해온 이건개 변호사. 그가 주장하는 위대한 대한민국의 청사진이 10년 안에 구축될 것으로 기대하며, 앞으로도 더 나은 대한민국의 길을 제시하고 이끌어갈 것이라고 전망해본다.

유희석 기자  nickyoo2610@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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