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을 좋아하는 자라야 착한 사람을 좋아한다)

COLUMN/帝王學談論

 

 

好善者라야 好 善人

(선을 좋아하는 자라야 착한 사람을 좋아한다)

 

글 恒山硏究室 恒山 金 裕 赫

 

선(善)은 큰 것도 선이요 작은 것도 선이다. 선인(善人)은 선을 행할 때에 는 큰 선과 작은 선을 구별하지 않는다. 선은 본질적으로 순수하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들이 애독하여 왔고 또한 많은 사람들에게 읽기를 권하는 명심보감(明心寶鑑)을 열어보면 처음부터 선(善)에 관해서 강조하고 있다.

 

첫째 항목에서 이르기를, 착한 일을 하는 이에게는 하늘이 복을 내리고 착하지 않은 일을 범하는 자에게는 화를 내린다고 했다.(爲善者 天報之以福, 爲不善者 天報之以禍). 이는 공자의 말이다.

 

둘째 항목에서는 작은 선행이라도 반드시 실행하며, 작은 비행이라도 절대 범해서는 안 된다(勿以善小而不爲, 勿以惡小而爲之)고 했다.

이는 촉한(蜀漢)의 유현덕(劉玄德)이 임종(臨終)하면서 그의 태자(太子)에게 간절한 마음으로 유언(遺言)한 내용으로 전해지고 있다.

 

셋째 항목에서는 하루라도 선행을 염두에 두지 않는다면 모든 악행이 이어서 일어날 것이라고 했다(一日不念善 諸惡 皆自起).

이는 전국시대 송나라 사람인 장자(莊子)가 남긴 말이다.

장자는 그가 상배(喪配)하였을 때, 그 부인이 늘 쓰던 물동이에 얼룩진 수택(手澤)을 어루만지며 비통한 마음을 노래로 달래었다고 한다.

그 때부터 아내를 잃은 애통한 마음을 고분지통(叩盆之痛)이라 한다.

(親喪을 天崩之痛, 子喪을 失明之痛, 兄弟喪을 割分之痛, 喪妻를 叩盆之痛)

 

넷째 항목에서는 착한 일을 보거든 목마른 듯이 느끼고, 악한 일에 관한 소문을 듣거든 귀먹은 듯이 하라고 했다(見善如渴 聞惡如聾).

이는 강태공망(姜太公望)이 남긴 말이다. 강태공망의 본명은 강여상(姜呂尙)이다. 그는 위수(渭水)에서 곧은 낚시를 담구고 물을 즐기며 깊은 사색에 잠겨있던 중 우연하게도 그 곳을 지나가든 주문왕(周文王)을 만나게 되었고 서로 깊은 대화를 나누다가 지기상통(志氣相通)하여 등용되기에 이르렀다. 당시 그의 나이는 이미 70세를 넘었다고 한다. 그가 살아가고 있는 생활실정은 오늘날의 노숙자 수준이었다. 그의 부인은 가난을 견딜 수 없어서 그의 곁을 떠나갔다. 그런데 강여상이 강태공망(吾太公望子久矣:임금의 아버지가 선망하던 인물이라는 뜻) 으로 알려지자 부인이 다시 찾아와 함께 살 것을 간청했으나 그 때 강태공망은 복수불부수(覆水不復收), 즉 엎질러진 물은 다시 쓸어 담을 수 없다는 말을 남겼다. 그의 말이 지금까지 사용빈도가 높은 속언(俗諺)으로 이어져가고 있다.

 

그밖에도 황하(黃河)의 범람을 다스린 하우왕(夏禹王)은 선한 말을 듣게 되면 그 상대가 누구이든 가리지 아니하고 절을 했다고 하여 이를 문선필배(聞善必拜)라고 한다. 선(善) 앞에서는 사회적 지위의 고하가 없다는 것을 귀띔해주고 있다.

특히 대학(大學)에서는 지어지선(止於至善)이라는 말이 첫 장 첫 구절에 나온다(大學之道는 在明明德하며 在新民하며 在止於至善이라). 지선(至善)이라는 것은 더 없이 극진한 선(善)을 말한다. 즉 최선(最善)이리는 뜻이다.

 

다시 말하면 지(止)라는 것은 일(一)과 정(靜)이 극점(極點)에서 하나가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퇴계와 이율곡이 서로 만나서 이기론(理氣論)을 주제로 하여 토론을 하였을 때 그 결론은 한 마디로 말해서 주일무적(主一無適)이었다. 즉 일(一)이상 더 나갈 곳이 없다는 뜻이다.

 

그리고 일동(一動)은 불여일정(不如一靜)이라는 말이 있다. 이 말은 송나라의 효종황제(孝宗皇帝)와 중국 절강성의 유명한 고찰(古刹)로 알려진 영은사(靈隱寺)의 당시 뱡장(方丈)이었던 혜원(慧遠)스님과 더불어 그곳의 비래봉(飛來峰)을 소재로 선문답(禪問答)을 하는 가운데서 나온 말이라고 전해지고 있다. 즉 한 번 움직이는 것은 한번 정지(靜止)함만 같지 못하다는 뜻이다. 즉 움직인다는 것은 정지할 곳을 찾기 위함임을 말하는 것이다.

 

이는 다름 아닌 정(正)을 의미한다.

왜냐하면 주일무적(主一無適)은 일지(一止)로서 정(正)을 말하는 것이며,

일동불여일정(一動不如一靜)은 일(一)에서 정지(靜止)함을 의미하고 있는바, 이것도 정(正)을 말하는 것이다. 따라서 정(正)은 지선(至善)이며 최선(最善)이다. 정직하지 않은 선인(善人)이 없듯이, 선한 사람 치고 정직하지 않은 이도 없다. 왜냐하면 심학(心學:宋代 眞德秀 述)에서 밝힌 정명도(程明道)의 말과 같이, 천하의 이치는 밝거나 어둡거나, 굵으나 가늘거나, 멀거나 가까우나, 낮거나 깊거나, 그 모든 것이 일(一)로 관철 되지 않는 것이 없기 때문이다(天下之理 幽明 鉅細 遠近 深淺 無不貫乎一者也),

 

맹자는 노(魯:孔子 母國)나라에서 악정자(樂正子)에게 정치를 맡겼다는 소식을 듣고 기뻐서 잠을 이루지 못했다고 했다,

(魯欲使樂正子 爲政, 孟子聞之 喜而不寐).

공손축(公孫丑)이 묻기를, 악정자는 강한 사람입니까(强乎)?, 아니다.

지성과 배려가 뛰어납니까(有知慮乎)?, 아니다.

견문과 식견이 풍부합니까(多聞識乎)?, 아니다.

 

그런데 어찌하여 기뻐서 잠을 이루지 못한 것입니까?(奚爲喜而不寐乎)?

맹자가 대답하기를, 악정자의 사람됨이 선(善)을 좋아하기 때문이다.

사람됨은 선을 좋아한다(好善)는 그 자체로서 족(足)하다고 했다.

 

정치를 함에 있어서(爲政), 일반 사람들은 자신의 장점만을 활용하는 것으로(用一己之長) 만족하랴 든다. 그래서는 안 된다.

세상에 전래 되어오는 모든 선을 소중히 응용할 줄 알아야 한다.

(貴於有以來天下之善). 왜냐?

선(善)을 자기 자신 속에서만 찾으려들면 한계가 있다(善取於己則有盡),

그러나 선을 다른 모든 사람들로부터 찾으려한다면 무궁무진하다(善取於人則無窮). 왜냐하면 선의 량(量)은 심대(甚大)하고, 선을 좋아하는 마음의 쓰임새는 무궁무진하기 때문이라(善之量 甚大, 好善之用 無窮) 하였다.

 

위의 내용을 음미해 볼 때 사람은 누구나 선(善)의 원점으로 복귀할 수 있는 가능성을 지니고 있다. 그러나 그것이 쉽게 이루어지 않는 경우가 많다.

왜냐하면 선을 좋아하는 욕구(好善之欲)보다는 이권을 좋아하는 욕구(好利之欲)가 상대적으로 더 강력한 충동을 주기 때문이다.

 

만약 우리들이 살아가고 있는 현실사회를 선(善)의 가치를 기준으로 하여 구체적인 사회적 사상(social phenomena)을 평가한다면 그 지수는 어느 수준으로 나타날 수 있을까?

누구도 그에 관한 정답을 찾아내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선인사회(善人社會)의 실현을 희원(希願)하고 있다.

 

특히 정권이 바뀌고 새 정부가 들어서게 될 때마다 그와 같은 기대는 부풀어 오르게 마련이다. 2013년 2월 25일에 출범하는 박근혜정부에 대하여 거는 기대도 예외는 아니다.

 

인인성사(因人成事)라는 말이 있다. 정치를 비롯하여 모든 일이 사람을 통해서 이루어진다는 뜻이다. 인사(人事)가 만사(萬事)라는 말도 그러한 뜻이다. 백성들은 회남자(淮南子)에서 말하고 있는 글귀와 같이 무루지인(無累之人)을 좋아한다. 비리(非理)와 비행(非行)과 비위(非違)등에 연루되지 않는 사람을 선호한다는 뜻이다.

 

매끄러운 인사청문회의 분위기가 보도될 수 있기를 기대한다.

이미 우리는 지켜봐 왔거니와 인사청문회에서 곤욕을 당하게 되는 주요 항목은 5가지 범위에서 집약되고 있는 것 같다.

첫째는 위장전입 의혹문제요,

둘째는 부동산 투기의혹문제요,

셋째는 본인 및 자녀 병력문제요,

넷째는 논문 등의 표절문제요,

다섯째는 국가관 및 직무능력문제다.

 

청문회를 거쳐야할 임용 예정자는 임명권자의 요청을 수락하기 전에 최소한 그 5가지 항목을 토대로 해서 스스로를 사전에 점검하여 문제점이 불거지기 이전에 거취를 분명히 해야 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쯤이야 어떠랴하는 서기지심(恕己之心)이 앞서 있는 사람들은 스스로 버리지 못한 오만과 방심이라는 덫에 걸려드는 경우가 많다.

 

첫째는 천하의 선을 귀히 여기라(貴於有以來天下之善)는 것을 잊었고,

둘째는 선을 다른 사람에게서 취하라(善取於人)는 것을 잊었기 때문이다.

이미 언급한 바와 같이 자신을 과신(用一己之長)하고, 자기 생각만의 선을 제일로 여긴(取善於己) 나머지 스스로의 허점을 살피지 못한 자초지화(自招之禍)를 피해가지 못하는 이들이 상대적으로 많았다.

 

논어에서 이르기를 세 사람이 함께 동행 하면 그 중에는 반드시 나의 스승이 있다(三人同行 必有我師)고 하였거니와 선인은 본받아야할 스승이요, 선인이 아닌 사람은 나에게 반성을 촉구하는 스승이라는 뜻이 담겨있다.

청문회의 경우에는 일반적으로 후자에 해당하는 스승이 많았다는 경고임이 분명하다. 새 정부를 이끌어갈 인사들에 대한 청문회에서는 선자(好善者)라야 호선인(好 善人)이라는 이미지가 새 정부 출범의 얼굴이 되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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