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 李, 全, 盧 대통령과 나

李承晩 초대 대통령, 일명 ‘이 博士‘와 제 11대. 12대 全斗煥 대통령, 제13대 盧泰愚 대통령과는 인터뷰를 하거나 행사 취재과정에서 직접 접한 일이 없다. 나의 취재 환경이 바뀌는 등 여건이 맞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간접적인 ‘인연’이 있었기에 여기에 적고자 한다.
이 박사는 바다가재 회를 좋아했다

나의 초창기 출입처인 부산 영도경찰서는 부산항을 출 입항하는 선박의 검문검색은 물론 해상보안 경비도 맡아있었다. 그 주무부서는 보안과 해상 보안 계. 그래서 과. 계장은 언제나 바빴다. 경비정이 시시각각으로 부산 해안경비에 나서고, 그 때마다 심심찮게 적발되는 밀수품이나 바다에 떠오른 변사체 등은 때로는 큰 기사거리가 된다. 한 때는 선박검문을 하며 ‘수금’을 한다는 말썽이 있을 정도로 이 자리가 ‘노른자위’로 각광 받은 적도 있다. 출입기자로서는 수사 과 못지 않게 신경을 써야 할 곳이다. 그래서 신문사에 들어가서 까지 틈만 나면 “뭐 떠 오른 것 없소 ?” 고 전화를 걸 정도였다.
나는 해안 경비정에 승선해 경비경찰의 근무상황을 심층취재 한 일이 있다. 그 때 경찰관에게 배운 것이 하나있는데 그것은 바다에 떠오른 변사체의 남녀를 구별하는 상식이다. 여자시체는 반드시 누운 자세로 배를 위로하고, 남자시체는 거꾸로 엎드려 있다는 것이다.
이야기가 좀 딴 방향으로 흘렀는데, 해상보안 계의 업무중 연중 행사처럼 해야하는 중대 ? 한 임무가 하나있다. 그것은 이승만 대통령의 식탁에 오를 바다가재를 잡아 산채로 진상 ?하는 일이다. 이 바다가재는 태평양의 수심이 깊은 바다 속에서 만 산다고 한다. 그 동안 서울의 경무대 (지금의 청와대)로 가는 바다가재는 어떻게 공급이 됐는지 알 수 없으나, 대통령이 진해 별장으로 내려 갈 때는 보안 계에서 맡는다. 연락을 받으면 외항선이나 전문 원양어선 등을 동원, 며칠을 걸려 잡아오면 확인 후 철저한 보호를 하여 쾌속정 편으로 진해로 급 송 한다. 불론 이러한 작업과정은 ‘대외 비’이다.
58년 여름이었다. 이른 아침 여느 때와 같이 경찰서 지하에 있는 수사 형사 실로 내려가려다 바로 오른쪽 해상 보안 계로 들어갔다. 좀 이상한 감이 들어서이다. 넓은 사무실에는 선원 차림을 한 민간인 1명과 경찰관 2명뿐이었고 계장은 서장실에 갔다는 것이다. 얼마 후 기자실 (2층)로 전화가 왔다. “김 기자 ! 나 조 계장인데 차 한잔합시다. 좋은 구경 하나 시켜 줄 테니 혼자 빨리 내려와요.” 그 길로 계장에게 내려갔다. 차를 권한 조 계장은 조심스레 말을 꺼냈다. “이 장어 통발 안에 무서운 동물 한 마리가 들어 있는데 잘 못 보면 물리는 수 가 있으니 조심조심 빨리 한번만 보아야 된다”고 으름장을 놓았다.
그러면서 조 계장은 두꺼운 보자기로 완전히 싸다 시피 덮어놓은 물동이 만한 장어통발 위쪽을 살며시 조금 열어 보였다. 보자기로 사방을 둘러쌓아서인지 어두컴컴한 안은 잘 보이지 않았다. ‘혹시 후닥닥 무는 건 아닌가 ?’ 싶어 약간 겁을 집어먹은 나는 자꾸 괜찮다는 조 계장의 말에 힘을 얻어 다시 가까이 가서 상자 입구 쪽에다 눈을 갖다댔다. 그 때서야 그 속에서 해초 냄새가 나면서 시커먼 물체가 약간 보였다. 큰 바다장어 등 쪽 같았다.

이 박사 별장 갈 때마다 깊은 바다서 잡아 ‘진상‘
내가 상자에서 얼굴을 떼자 조 계장은 “이젠 됐지요. 알만하지요”라며 설명을 해 주었다. “외국 잡지 등의 요리선전에 많이 나오는 그 검은 바다가재이며, 대통령께서 잡수실 겁니다. 부산 근해에는 없고 멀리 아주 깊은 바다의 냉수 대에서만 사는 흑 가재인데 원양어업 전문가에게 특별부탁을 해 며칠만에 힘들여 잡은 것이요. 만약 죽으면 안돼요. 산채로 진해 별장으로 급 송을 하여 주방장에게 넘겨 검사를 받아야 임무가 끝나는 거요. 대통령께서 검은 바다가재 회 요리를 가장 좋아하신 다요. 그래서 장수하시는 것 같아요.”
일장설명을 하고 난 조 계장에게 한번 더 보고싶다고 하자 “허 허 ! 김 기자 내 모가지 뗄라 카나”라며 햇빛을 보게되면 잘 죽기 때문에 그렇다며, 가재 몸통에 덮어놓았던 해초까지 걷어 보여주었다. 과연 어마어마했다. 장골 팔뚝크기 만한 검은 괴물 같았으며 장어통발 안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그리고 조 계장은 나에게 한 가지 부탁을 했다. “절대 바다가재 이야기는 비밀입니다. 신문에 내어서도 안되며, 김 기자를 믿기 때문에 보여드린 것입니다.....”
이승만 대통령은 가끔 부산에서 특별경비정 편으로 진해 별장으로 향하기도 했는데 영도다리 쪽으로 지나가는 그에게 다리 위를 지나던 부산시민들이 손을 흔들어 환영하는 모습도 보였다.
대한민국 초대, 2대, 3대 대통령을 지낸 그는 1960년 부정선거에 의해 4선이 되었으나 4.19혁명으로 그 해 5월29일 하와이로 망명하여 1965년에 서거, 국립묘지에 안장되었다.

全 대통령과 같은 고향- 입에 자주 오르내려

박정희 대통령 시해사건 수사를 총괄했던 전두환 국군 보안사령관이 1980년 8월27일 대통령 보궐선거에서 제11대 대통령으로 당선되었다. 대통령의 유고로 최규하 대통령 권한 대행이 박 대통령의 국장(國葬)을 마치고 1979년 12월 제10대 대통령에 선출 된 후 재직 8개월20일 만에 대통령직을 사임함으로써 실시된 보궐선거였다.
그리고 전두환 대통령은 1981년2월15일 제5공화국 헌법에 따라 제12대 대통령에 선출됐다. 11대는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12대는 선거인단의 간접선거에 의해 이루어졌다.
나는 전두환 보안사령관이 대통령이 되면서부터 심심찮게 기자들과 주변 친구들의 입에 오르내렸다. 고향이 경남 陜川으로, 그와 같았기 때문이다. 거리 상으로 마을 하나를 거치면 닿을, 지척에 있었으며 승용차로 10여분 걸린다. 시골에서 그 정도면 ‘누구 집 아무개’ 하면 통 할 만큼 가깝다. 그래서 짓궂은 친구들이 나를 잡고 놀리는 것이다.
“김 선배 ! 청와대에서 소식이 없어요. 앞으로 만나기 힘드는 것 아닙니까.”
“무슨 말이야 이 사람들 사람 잡겠네. 청와대 같은 거 좋아 안 해 그런 말하지도 마라”
“어쨌든 잘 봐 주십시오.”
“이거 참 골치 아프네”...
이런 식의 대화는 약과다. 정색을 하며 ‘잘 아는 분 아니요’고 묻기도 하고 ‘한번 다리를 놓아 보라’고 진지하게 권하는 친구도 있었다. 그럴 때마다 나는 그 옛날 참외서리를 하던 이야기, 돌을 던지며 패싸움하던 철부지 때 짓을 이야기하면서, ‘혹시 그 시절에 만난지도 모른다’고 사족을 달았다. 이렇게 설명을 해도 주변의 관심은 끊이질 않았다. ‘世態人心 인 것을 어찌하랴’...... 나는 마음을 편하게 먹었다.
얼마 후 전 대통령의 ‘조상 호화분묘’ 문제가 제기 되었다. -어느 지역 산을 사들여 조상의 묘를 이장하면서 초호화분묘를 조성했다-는 내용이다.
이 문제가 있고 난 다음해 봄 서울신문 편집국 순회취재팀으로 경남지역 취재를 갔다. 합천군에 둘러 노을환 군수로부터 미숭산 관광지 개발에 관한 설명을 들었다. 그는 “해인사는 피서관광이 위주이지만 미숭산 관광지는 청소년들의 심신단련과 호국정신을 함양하는데 목적을 두고있다”고 말했다.
취재를 마친 나는 모처럼 고향에 간 김에, 은퇴 후 고향 (합천군)적중면에서 생활하고있는 김정옥 친척을 찾아 근황을 물으며 담소했다. 이야기 끝에 자연스레 전 대통령에 관한 이야기도 나왔다. 그래서 전 대통령의 생가마을을 둘러보고, ‘호화분묘’ 등 설명을 들을 수 있었다.
우리는 승용차로 10여분만에 그 생가마을에 도착했다. 말끔하게 단장된, 40여가구가 사는 전형적인 농촌마을이었다. 마을 오른쪽 야산에 자리한 한 묘역이 눈길을 끌었다. 바로 전 대통령의 조부모 묘역이라고 했다.
산 중턱에 2기의 대형 묘가 자리하고 그 아래로 폭50미터 길이 70미터 정도의 타원형 산중호수가 나 있고 호수 건너 쪽으로 수 십 년 생 소나무들이 숲을 이루어, 한마디로 축소판 풍광명미 (風光明媚)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는 그 소나무 숲에 앉아 청정호수를 바라보며 잠시 쉬었다. 호수를 내려다보고 있는 묘역이 아주 명당 같았다.
“저 묘는 (전 대통령)조부모 묘이고, 저쪽 (고령 쪽)산 위에 얼마 전에 조성한 부모님 묘소가 있어요. 문제가 될 만큼 그렇게 호화분묘는 아니라던 데요.”

한 때 말썽 ‘호화 분묘’는 성공한 동포 분묘보다 못해
나는 귀경길에 고령 재에 차를 세웠다. 호화분묘를 한번 확인 해보고 싶어서다. 산길을 따라 5분 정도 오르는데 사복 경찰관이 “출입을 하지 못합니다.”며 막았다. 서울신문 기자라면서 호화분묘라는 그 묘소를 한번 보러왔다고 하자 “뭐 호화분묘는 아닌데...”라고 혼잣말을 하며 안내를 했다. 위쪽으로 조금 올라가자 2기의 묘와 비석이 보였다. 나는 대뜸 “이 묘소가 ‘호화’라는 겁니까?“고 물었다. 그 경찰관은 ”산 정상에 헬리콥터 착륙장을 새로 조성 한 것이 좀 다른 겁니다.”란 말을 하고 자리를 비꼈다.
내가 보기에도 호화분묘는 아니었다. 어지간한 부자 집이나, 해외에서 성공한 동포들이 조성한 초 호화분묘에 훨씬 못 미치는 그런 묘소였다. ‘이 사람들 진짜 초호화분묘 보지도 못했나 ?’...나는 이런 생각을 하면서 산을 내려와 고령-대구를 거쳐 상경했다. 다음날 귀사 후 ‘호화분묘’ 확인 사실을 보고 느낀 대로 기자들에게 설명해 주었다. 고개를 끄덕이기도 했지만, “같은 고향 대통령이라고 팔이 안으로 굽는 모양이지요”란 쓴말도 여러 번 들었다.

盧 대통령이 보낸 생일 선물 “경비실에 맡기세요”

1987년 6월 29일 민정당 노태우 대표위원이 민주화 8개항을 선언, (6. 29선언) 대통령 직선제 등의 헌법개정안을 공고하고 같은 해 10월 29일 공포했다. 이에 따라 지난 1972년 11월 21일 유신헌법이 확정되면서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에 의해 8대 대통령이 선출된 후 15년 만에 국민에 의한 직접선거를 실시하게 되었다.
1987년 12월 16일에 실시된 제13대 대통령선거 결과, 노태우 후보가 8,282,738표로 당선됐다. 다음은 통일민주당 김영삼 후보 6,237,581표, 평화민주당 김대중 후보 6,113,375표, 신 민주공화당 김종필 후보 1,823,067표, 신정일 후보 46,650표 순이었다.
노 대통령 취임 후 정치 경제 사회 전반에 걸쳐 민주화 바람이 불고 있을 무렵인 1990년 10월 13일 서울에서 장남 (光郁)결혼식이 있었다. 맏며느리를 본 것이다. 이들은 우리가 대구에서 이사와 살던 경기도 안양시 비산동 아파트에서 신방을 차렸다. ‘장남이지만 1년 동안은 부모와 함께 살다가 나가는 것이 서로 좋지 않겠느냐’며 약속한 대로 아파트 문간방에서 함께 살았다.
나는 처음 시집 온 며늘아기가 혹시 실수라도 하면 어쩌나 고 염려한 나머지 ‘험한 세상사는 지혜’ 몇 가지를 일러 주었다.

새 며느리, 내가 말한 ‘범죄예방책’그대로 실행...결례
“요새는 하도 세상이 험해서, 특히 대낮에 여자 혼자 있는 집을 노리는 범인이 많다. 범죄수법도 아주 지능화되어 ‘가스 검침 나왔다’ '동사무소 직원이다‘ ’무슨 배달 왔다‘는 등으로 가장해 문을 열게 한다. 문을 열어주면 칼이나 흉기를 들이대고 돈을 뺏고, 돈이 없다면 카드를 뺏어 비밀번호까지 확인해 돈을 인출해 간다. 그리고 몸을 해치는 경우도 있다.”
“그래서 집에 혼자 있을 때는 누가 와도 쉽게 문을 열어주면 안 된다. 만약에 소포가 왔다. 무슨 선물을 갖고 왔다. 설사 청와대에서 왔다고 해도 무조건 경비실에 맡겨 두라고 해야한다.”
너무 장황하게 말하여, 긴장감 마저 들게 했다.
이렇게 당부를 하고 난 며칠 후 엉뚱하게 정말 청와대에서 선물을 든 경호원이 나를 찾아왔다.
“대통령께서 보낸 선물을 갖고 왔습니다.”... 아파트 경비원으로부터 인터폰을 받은 며느리는 일언지하로 “경비실에 맡겨 놓으세요”라고 말했다. 내가 일러 준 그대로다. 그날저녁 퇴근을 하니 집안에는 아름 들이 생화 바구니와 6년 근 홍삼세트, 그리고 축하 케이크 등이 놓여있었다. ‘생신을 축하합니다. 대통령 노태우’ 라고 적힌 리본과 함께... 생각지도 않은 귀한 선물이었다.
“이것 참 미안하게 되었군. 이 먼 곳까지 오신 분들을 차 한잔 도 대접 못하고 그대로 보냈으니 얼마나 서운했겠나”... 내 말에 부인도 “그러게 말이요”고 한마디 거들었다. 며느리에겐 “잘 했다. 잘 했어”라고 멋쩍은 칭찬을 했다.
사노라면 ‘선의의 실수’를 할 경우도 있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느낀 한 사건이었다. 일간 신문사 사회부장 시절에 있었던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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