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화무쌍한 격동기의 파도를 극복하고 결실 이뤄내

최재덕 익산 주얼리 백화점 대표

아무리 좋은 보석이라 하더라도 실력 있는 장인의 손길 없이는 빛나는 작품이 만들어 지지 않는다. 오로지 숙련된 장인의 손에서 탄생한 보석만이 독특한 감수성을 담아 찬란한 광채가 흐른다. 모든 것을 기계로 찍어내는 것이 너무 당연한 것 같이 되어버린 요즘 시대, 아직도 손으로 일일이 세공하는 일을 보는 것은 너무나 아름답다. 본지에서는 익산시 주얼리 분야에서 독보적인 인지도를 쌓아나가고 있는 세공장인이 있어 만나보았다. 바로 익산 주얼리 백화점 최재덕 대표로서, 변화무쌍한 격동기를 극복하면서 무엇보다 가격 대비 ‘가치’를 최우선으로 두었기에 소비자들의 꾸준히 사랑을 받고 있다.

최 대표는 얼마 전 전국에서도 손꼽히는 규모의 매장인 주얼리백화점을 오픈했지만 그에게 위기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그는 사업의 성공이라는 목표를 향해 나가는 과정 속에서, 모퉁이를 돌때마다 만만치 않은 복병을 만났다. 하지만 시련을 극복해가면서도 뼈를 깎는 노력, 남들과 다른 기술력과 열정, 그만의 독창성 등이 성공의 중요한 밑거름이 되었고, 그의 재능을 꾸준히 발전시켜 이제는 이제 쥬얼리 분야에서 뛰어난 장인으로 단단히 자리매김하고 있다.

“사업을 하는 동안 여러 가지 어려움도 있었지만, 다시는 실패했던 때로 되돌아가지 않겠다고 마음먹고 내실을 다지며 한 계단씩 밟아오느라 시간이 꽤 오래 걸렸다. 그때의 경험이 밑거름이 되었고 최선을 다한 만큼 오늘날까지 이르게 된 것 같다”고 돌이켜보는 최재덕 대표는 “고객들을 만족시킬 수 있는 최고의 디자인과 함께 가치지향의 주얼리 문화를 꾸준히 조성해 나아갈 것”이라고 소신을 밝혔다.

이어 “아무리 경기가 침체되었다 하더라도 기술력과 신용을 잃지 않고 신뢰를 쌓아간다면 반드시 길은 열린다”고 전하며, “사업영역의 다각화를 위해 국내시장에서도 소비자들이 보다 개성 있고 창의적인 고품격 제품을 저렴하게 구입할 수 있도록 준비했다”고 소개했다.

한편 최재덕 대표는 지난 7월 초 귀금속1단지 보석거리에 주얼리백화점(선화로 63길 3-2)을 오픈했다. 전국에서 가장 넓은 매장을 자랑하는 주얼리백화점은 고객들이 차를 마시며 각종 보석제품을 천천히 감상하고 취향에 맞는 보석을 구입할 수 있도록 커피숍 컨셉으로 구성했으며, 1층 300여㎡(90여평)의 매장에는 여성이라면 하나쯤 장만해야할 우아하고 세련된 보석, 각종 귀걸이·반지·팔지·목걸이 등의 패션디자인 제품 2천여 점이 고객을 맞이한다. 그리고 2층에는 귀금속을 가공하는 시설이 들어서있다.

익산주얼리백화점 전경

40여년 오직 한 길, 익산 귀금속산업의 산증인

우리나라의 귀금속산업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은 1976년 정부의 수출드라이브 정책에 힘입어 전북 익산시에 귀금속보석가공단지가 조성되면서부터이다. 그 이전까지만 해도 한국의 귀금속 산업은 핸드메이드 위주의 영세 소매상들이 업계를 이끌어갈 때였다.

그리고 1980년대 들어서면서 귀금속 산업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고, 익산의 귀금속가공단지에서는 주로 큐빅이나 유색보석 수탁 가공을 위주로 했으며, 그 당시 세계 최대의 큐빅 수출국으로서 다이아몬드를 연마해 수출 할 만큼 호황을 누렸다.

최재덕 대표도 넉넉지 않은 집안형편이었기에 일찍이 다이아몬드 연마기술을 배웠고, 한푼 두푼 모아 82년부터 본격적으로 사업을 시작했다. 하지만 80년대 후반부터 국내의 임금수준이 상승되면서 큐빅 산업은 점차 경쟁력을 잃어갔다. 당시 6천여 명이던 귀금속 종사자들은 대부분 짐을 싸서 인건비가 저렴한 중국으로 진출했다.

그러나 남다른 재능을 타고난 그는 움직이지 않았고 금은 세공으로 방향을 틀었다. 손재주가 워낙 뛰어난 최 대표가 세공업계에서 기술을 인정받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최재덕 대표는 “보석세공은 제게 천직이었는지 시간가는 줄도 모르고 일에 빠졌다”며, “1980년대 후반부터 91년까지 엄청나게 일이 몰려들어왔고 직원들과 금은 세공으로 상당한 호황을 누렸다”라고 지난날을 회고했다.

하지만 사업을 하다보면 예상치 않은 복병들을 만나게 되고, 이 모든 복병들은 시간과 비용으로 그 무게를 고스란히 감당해야만 한다. 그 역시 “최선을 다해서 성공할 것”이라는 후배들을 믿고 보석세공과는 전혀 다른 석재사업에 뛰어들게 된다. 아무리 좋은 경쟁력을 가지고 있는 비즈니스라도 결국에는 사람이 해야 하는 것이 사업이다. 그는 후배들을 믿고 석재를 다듬어 벽에 붙이는 대리석 사업을 시작했지만 막상 사업을 시작하니 후배들은 열심히 하지 않았고, 그 역시 경험이 없는 만큼 부도가 나는데 까지는 시간이 얼마 걸리지 않았다.

“93년 당시 대기업 초임 월급이 50만~60만 원이었으니 2억 5천만원의 부도액은 상상할 수 없는 큰 금액이었다”고 최 대표는 전하며, “결혼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아이들이 걸음마를 할 시기였는데 집, 자동차, 가구 등 전 재산이 모두 압류되어 하루아침에 길거리에 나앉을 정도로 처참했다”고 당시 상황을 털어놓았다.

업계 초창기부터 변화무쌍했던 격동기의 파도를 잘 헤쳐 나온 그의 항로는 석재사업으로 인해서 한순간 올-스톱이 되었다. 30대 초반의 나이에 닥친 시련은 그에게는 감당하기엔 적지 않은 충격이었다. 하지만 아내와 어린 두 아들을 생각하며 이를 악물고 일어서야만 하는 현실이었다.

최 대표는 “하루 3~4시간의 잠을 자면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가리지 않고 하면서 드디어 부채를 갚고 은행에서 신용을 회복하는 데까지 8년이라는 시간이 걸렸다”면서, “제 자신과 경쟁이라고 생각하며 오직 앞만 보고 죽을 각오로 최선을 다한 결과 약간의 종자돈까지 마련했다”고 회고했다.

전주에 위치한 금은주얼리 경영을 맡고 있는 최종흠 대표

주얼리 시장을 선도한 테니스 팔찌, 기술력으로 승부.

최재덕 대표는 비록 기술력은 갖추고 있지만 다른 사람들보다 월등하게 자본이 많은 것도 아니었고, 배움의 시간이 길었던 것도 아니어서 새로 출발한 사업에서 어떤 방식으로 접근해야 될지 귀금속의 시장성에 대해서 보다 세밀하게 조사를 했다. 마침 당시부터 우리나라에도 주얼리 브랜드가 하나 둘씩 생겨나면서 비로소 주얼리 산업이라는 독자적인 형태를 띠기 시작하였고, 주얼리를 통해 자신을 표출하려는 여성들이 대거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시장조사를 통해 그가 찾은 것은 바로 ‘테니스 팔찌’였다. 대중에 널리 알려진 ‘테니스 팔찌’라는 이름은 유명 테니스 선수의 경기 일화에서 유래했다.

세계 랭킹 1위 테니스 선수 크리스 에버트는 US오픈 시합 중 심판에게 경기 중단을 요청한다. 착용하고 있던 다이아몬드 라인 팔찌가 손목에서 빠졌기 때문이다. 격렬한 팔의 움직임으로 걸쇠가 풀려서 벌어진 일이다. 팔찌를 찾을 때까지 경기는 중단됐고 그 장면은 전 세계에 중계됐다.

사람들은 이때부터 다이아몬드 라인 팔찌를 ‘테니스 팔찌’라 불렀다. 그 후 테니스 팔찌는 여성들의 사랑을 한 몸에 받았다. 그는 센터를 만들고 모던하면서도 참신한 분위기를 연출해 젊은 층을 끌어들이는 전략을 구사해 ‘테니스 팔찌’를 제작했다. 그리고 직접 디자인과 여러 샘플을 들고 “여기서 승부해 보겠다”고 각오를 다졌다. 그는 직접 만든 제품을 들고 종로 도매상부터 서울, 대전, 수원 등 전국을 다니며 마케팅을 시작했다. 마케팅을 위해 수많은 스트레스를 받으며 고통을 치룬 대가로 다시 한 번 성공가도를 달리게 된다. 열심히 뛰다보니 전국구로 거래처가 생겼다. 사업은 비교적 순탄하게 흘러갔다.

게다가 주얼리 쪽의 대기업이라고 할 수 있는 큰 업체에서 금뿐만 아니라 은까지 엄청난 양의 하청을 받아 주문하는 대로 납품하면서 형편도 좋아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번에도 운명은 순순히 지나치지 않았다.

하청 일을 하다 보니 마진폭은 적지만 물량은 많아 직원을 많이 쓸 수밖에 없 없는 구조였다. 거기다가 대부분 어음으로 결제를 받았는데 주 거래처에서 회사 경영상 문제가 생기면서 대금을 받지 못한 것이 가장 큰 원인이 되었다.

“18명의 직원들이 함께 일하고 있었는데 월급을 깎는다든지 직원을 자르는 것은 제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아서 일감이 줄어드는데도 어떻게든 버텨보려고 했지만 결국 자금압박이 들어왔다”고 최 대표는 털어놨다. 그러한 이유로 직원들 월급을 줄 때마다 조금씩 빚이 늘어났다.

그렇게 조금씩, 조금씩 쌓인 빚이 연쇄적으로 발생해 6억원까지 늘어난 것이다.

두 번째 부도는 12년 전인 2008년도에 발생한 일이었다. 그가 두 번째 부도를 맞았을 때는 앞선 부도사태 보다는 유연하게 대처해 개인회생 절차를 밟아 다시 일어났다.

그런 과정을 겪으면서 기술력과 열정만이 회사와 개인의 성장에 가장 큰 원동력임을 몸소 확인했다. 그리고 이듬해인 2009년 기술력과 끈기를 바탕으로 남들보다 몇 배 더 힘을 쏟아 다시 한 번 일어나 귀금속사업을 시작했다.

익산주얼리백화점에서 경영을 하고 있는 최명흠 대표.

오뚜기 정신으로 재기, 국내 최대 명품매장으로 선보여

최재덕 대표는 두 번째 부도 이후, 남다른 차별성을 갖추기 위해 연구를 멈추지 않았으며 또한 밖으로는 지속적으로 거래처를 넓혀가며 신뢰를 쌓아왔다. 여기서 멈추지 않고 한 단계 더 오르기 위해 기술력도 끊임없이 연구하며 업그레이드를 해왔다.

2009년 당시, 반 지하의 열악한 환경에서도 고객을 사로잡을 창의적이면서도 섬세하고 감각적인 스타일을 생각해 모든 열정을 일에 쏟아 부었다. 오로지 일만 생각하고 일에 빠져있어서 밥 먹는 시간도 잊어버릴 정도로 정신없이 활동을 했다. 한참동안 일하다가 정신 차리고 보면 어느새 저녁이 되었고, 점심 때 주문한 밥이 차갑게 식어있었다. 그렇게 심혈을 기울인 샘플을 만들어 전국 금은 도매상을 찾아다니며 주문을 받아 밤낮으로 일을 했다. 그리고 2015년, 6년 만에 빚을 청산한다.

“직접 영업전선에 뛰어다니며 오더도 받아왔지만 제게 기술력이 없었다면 도저히 감당을 못했을 것”이라고 말하는 최 대표는 “오늘 해야 할 일들을 내일 한다고 미루지 않고 지금 당장 실천을 했다”고 전했다. 특히 “열정적으로 뛰다보면 지금 어려운 나의 현실은 자연스럽게 바뀔 것이라고 생각했다”고 지난날을 회고했다.

돌이켜보면, 40년 동안 귀금속사업을 하면서 다양한 일들을 겪어와 마치 장편영화 같다고 할 수도 있는 최재덕 대표의 만만찮은 인생길이었지만, 그 시간들은 결코 무의미하지 않았다. 2015년, 마침내 빚을 모두 청산하고 최 대표 인생에서 새로운 결실을 담게 된다. 아파트를 담보로 은행대출을 받아 영등동 귀금속1단지에 있는 230㎡(70평) 짜리 건물을 매입한 것.

최 대표는 이 곳에 공장을 차렸고, 군대를 제대한 두 아들도 아버지의 사업에 합류해 힘을 보냈다.

2017년에는 전주 송천동에 금은주얼리를 개업해 큰아들 종흠씨가 맡았고, 이듬해 공장을 매각해서 국내 최대의 매장인 현재의 익산건물을 구입해 지난 7월 주얼리 백화점의 문을 열었다. 이곳은 둘째아들 명흠씨가 맡고 있다.

최 대표는 “제가 부모님 덕을 못 받아서 18세부터 사회로 진출해 쉽지 않게 살았다”고 말하며, “그래서 우리 아이들만큼은 부모님 때문에 힘들게 하고 싶지 않다”고 속내를 비쳤다. 또한 사업을 하는 사람들에게도 한 마디 아끼지 않았다. “모든 사업의 첫째는 신용, 둘째도 신용으로서 은행거래를 잘 하고, 약속은 어떤 일이 있어도 지켜야 한다.”고 당부했다. 특히 누구보다도 힘든 여정을 걸어왔기에 고객들의 마음을 더욱 잘 헤아린다는 최재덕 대표는 “지나치다 잠깐 들러서 상품을 둘러보시더라도 차 한 잔 마시면서 편안한 마음으로 감상할 수 있도록 공간을 만들었다”면서, “2층에서 직접 세공해서 생산·판매하는 제품이 80% 이상이라 중간 유통 마진이 없어 어느 곳보다 저렴하게 판매하고 있다”고 귀띔했다.

최재덕 대표는 40여 년간 오직 한길을 걸은 장인으로 지금도 보석 가공을 직접하고 있다.

끝으로 “지금은 동종업계의 경쟁이 더욱 치열해지고 있어 업그레이드를 통한 양질의 성장에 더욱 치중할 계획”이라고 밝히는 최재덕 대표는, 현재 경영인으로 우뚝 서 있으면서도 직접 세공하는 일을 마다하지 않고 날마다 최선을 다해 뛰어다니며 ‘보람’이라는 이름을 바쁜 하루일과에서 찾고 있다. 글로벌시장이 어수선할 때마다 사람들은 안전자산인 금을 찾기 때문에 금은 여전히 투자 1위의 지위를 자랑한다. 세월이 흘러도 투자의 보루이자 부의 상징인 금의 가치가 변하지 않는 귀하고 값진 최고 가치의 상징물이기 때문이다. 또한 반짝거리는 귀걸이나 찰랑이는 팔찌를 손목에 하나만 착용해도 격식 있는 자리에서 우아하고 세련된 모습을 연출할 수 있다.

익산시에 방문할 기회가 있다면 익산의 미륵사지 등 명승지 관광과 함께 장인의 손끝에서 빛을 발하며 살아 숨 쉬는 명품보석의 주얼리백화점이 있다.

익산 주얼리 백화점에 전시되어 있는 보석 제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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