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 나는, 그때 우리는 어디에 있었을까

아득한 태고 적 을나(良乙那)시조가 한라산 모흥혈에서 탄생하시고 탐라국耽羅國을 개국하였을 때. 1580년 구졸암공(梁喜)이 명明에 동지사로 가셨다가 마적단의 습격을 받고 옥하玉河의 객관에서 순직하였을 때.

임진년 왜란이 나자, 서계공(梁弘澍)이 아들 진우제(榥)와 가산을 정리, 화살과 병기를 싣고 함양서 육로로 배로 의주용만龍彎까지 달려가 선조를 배알하였을 때. 당시 18세 진우제가 원군을 이끌고 압록강을 건너온 명나라 장수 이여송을 환영하는 시詩를, 많은 군민軍民과 문무백관 앞에서 가장 먼저 읊었을 때.

정유재란 봄, 평양성전투의 부상으로 끝내 스물셋 진우제공이 6개월도 안된 핏줄 하나(颎甲) 남겨두고 먼 별빛은하로 돌아가야 했을 때. 그리고 스물아홉 좌승지공(颎甲)이 이괄의 난이 나던 해, 세 살 된 피눈물(錫九) 가슴에 묻고 가없는 벽공碧空으로 떠나야만 했을 때.

정묘년 호란胡亂이 있고 15세 병자년에 다시 호란이 닥치자, 봉은공(錫九)이 가보 용만분문록龍彎奔問錄을 무참히 짓밟히는 기전畿甸에 묻고 호서湖西로 피란을 가야만 했을 때, 그 봉은공(蓬隱公)이 스물에 아들(重厦)을 보고 마흔에 손자(聖揆)를 보고 진갑進甲에 가서 증손(廷虎)을 보고, 증손이 1712년 정시에 장원급제하며 한집안 3대가 연속 과거에 급제했을 때.

 

아! 그때 나는, 그때 우리는 어디에 있었을까 .

 

양을나(良乙那) 상고시대 부족국가(部族國家) 탐라와 양씨의 시조《고려사》지리지 탐라현조《古記》에 따르면, 태초에 제주에는 사람이 없었는데, 어느 날 한라산 북쪽 기슭 모흥혈(毛興穴)에서 3인의 신인(神人)이 솟아올라왔다. 첫째가 양을나(良乙那), 둘째가 고을나(高乙那), 셋째가 부을나(夫乙那)였다.

 

양희(1515-1580) 구졸암九拙菴. 1546(명종1) 식년문과에 급제 정언(正言)·지평 등을 지내고, 1568년(선조1)에 예빈시정(禮賓寺正)으로 춘추관편수관을 겸직『명종실록』편찬에 참여. 파주목사·사간·의주목사·승지를 거쳐, 1580년(선조13)에는 장례원(掌隷院)의 판결사(判決事)를 지냄. 같은 해 동지사(冬至使)로 명나라에 갔다가 마적단의 습격을 받고 옥하(玉河)의 객관에서 순직. 뒤에 이조판서에 추증되고 함양의 구천사(龜川祠)에 제향. <구졸암문집>에 120수의 시편을 남겼고 오도재에 <지리산> 시비(詩碑)가 있다.

 

용만분문록(龍彎奔問錄)남원양씨 문중의 가보인 용성세고에 실림. 1592년 임진왜란 때 양홍주(서계공)와 아들 황(진우제공)이 화살 4만개와 장편전 3백부를 만들어 함양에서 음력 10월1일 출발, 육로로 운봉, 남원, 임실, 전주, 만마동, 임피현까지 여기서부터 배로 군산, 홍주, 당진, 덕물도, 평안도, 증산, 정주, 선천부를 거쳐 12월 2일에 의주 용만에 가 준비해간 전죽과 장편 식량을 군문에 전달하고, 명나라 이여송 군대와 평양전투에 참여하고 난 후 양황이 어가를 호위하며 환도할 때까지의 난중 서사시.

 

양홍주(1550-1610) 서계西溪. 학문이  성리학을  이룩한  당시  우계성혼  이후  판을  이용,    그 업적이 인정되어    증직되었다. 묘소는 양주시청 건너편 마전리에 있고 함양 구천서원에 제향. <서계문집>을 남겼다.

양황(1575-1597) 진우제眞愚齊. 우계 성혼의 제자. 용모가 준수하고 풍채가 늠름하였으며, 어린 시절부터 학문과 문장을 인정받아 큰 기대를 받았다.

18세가 되던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아버지 홍주와 함께 의병을 일으켜 때마침 경상도에서 활약하고 있는 고모부 정인홍(鄭仁弘)에게 합세하려고 했을 때 아버지를 설득, 김성일의 휘하로 들어가 크게 용맹을 떨쳤으며, 다시 아버지와 함께 가재를 정리 식량과 화살 등을 마련한 후, 함양서 용만(義州) 선조가 있는 곳까지 이 천리를 달려가 이를 헌납, 당시 명(明)나라 이여송(李如松)이 원군을 이끌고 압록강(鴨綠江)을 건넜을 때 군민(軍民)과 사대부들이 모두 환영을 하였고, 이때 여러 학사(學士)들이 운(韻)을 나누어 시를 읊었는데, 양황이 가장 먼저 시를 읊었고, 이후 양황의 시는 많은 이들에게 회람되며 문장이 널리 알려지고 명성이 높아졌다. 묘소는 양주 덕계동에 있고 <진우제문집>을 남겼다.

 

양석구(1622-1692) 봉은蓬隱. 조부 황. 세살 때 부친(熲甲)이 돌아가시고 15세에 할머니와 어머니 외가의 도움으로 병자호란을 피했다. 1948년 진사시에 합격 수차례 천거되었으나 진흙탕엔 안 간다며 나가지 않았다. 학문을 오로지하고 전하며 반드시 받아 펼침으로서 선대의 덕을 자랑스럽게 닦고 공 드리는 것을 근본으로 삼고자했다.

또한 자신을 단속함에 엄했고 적은 틈에라도 글을 보고 좋아했고, 기일 새벽엔 깨끗이 정돈, 말년까지 정성을 다해 자손의 맡은바 임무에 게으름이 없었다. 선대로부터 내려오는 유고 행장을 정성껏 보관하고 재료를 모아 저술. 30년 동안 도를 칭하며 살고 증자를 말하며 다시 장가들지 않고, 일찍이 세상을 개탄하며 좁은 서실에 들어가 스스로 호를 봉은이라 했다. 만년에 동몽교관을 받고도 칩거하자 통정계의 첨지중추부사를 제수, 증 대사헌(大司憲). 2남 5녀를 두었고 장남중하, 손자성규, 증손정호가 3대에 걸쳐 대과에 급제. 묘는 양주 덕계동에 있으며 <봉은문집>을 남겼다.

양윤식 (梁胤植) 시인

경기 안성 출생.

중앙대학교 경영학과 졸업.

2005년 계간 <시평>으로 등단.

현 한국작가회의 회원.

MT산업개발, MT홀딩스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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