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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강하고 평화로우며 행복한 사회를 이루는 소통을 위하여
  • 유희석 기자
  • 승인 2019.12.09 08:47
  • 호수 285
  • 댓글 0
유희석 취재팀장

대한민국은 2019년 현재 국내총생산 규모가 세계 12위, 일인당 국민소득은 3만 달러를 넘긴 경제 강국이 되었다.

하지만 국민 개개인의 입장에서는 사회불평등 지수와 가계부채에서는 위험수준 경고가 빈번히 일고 있으며 진보와 보수로 분별보다 차별되는 정치 구조로 끊임없는 갈등에 시름하며 자살율과 행복지수 등 국민들의 삶의 질과 관련되어서는 경고등이 켜지고 있는 현실이다. 사회에서 필요한 소통에 대한 관점을 고찰하는 중 미국의 희극 배우 찰리 채플린이 “인생은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지만 멀리서 보면 희극이다"고 말한 살아있는 지혜가 필요한 때인 듯하다. 공동분모처럼 필요한 부분으로 국민 각자의 행복과 생활의 안전을 위하여 보다 장기적인 안목과 관점으로 희망을 찾을 시간이 되고 있다.

그러므로 보다 크고 보편적이며 구체적인 관점의 제시를 위하여 정치색과 인종, 나라와 종교 등의 각자의 조건을 넘어 남녀노소와 동서고금의 보편적 공감대 속에서 우리가 잊고 살던 삶의 지혜를 찾으려 한다. 행복을 위하여 많은 사람들이 정치와 종교 사회 문화 모든 면에서의 소통의 필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우리 남녀노소 모두 서로가 아무리 각각 다르다고 하여도 우리는 모두 각자의 양심인 신앙으로 종교라는 공동체적 관점을 가지며 사랑하는 사람들과 가정 공동체를 이루고 직장과 정당 등의 사회 활동을 한다. 지역 공동체로서 국가를 이루고 우리의 양심으로 소통하면서 행복을 추구하는 동서고금 나아가 빈부귀천의 보편적인 인성을 가진 다 같은 인간이라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인류가 사회에서 소통하는 과정이 민주주의의 역사가 되었으며 그렇게 소통의 관점으로 이중에서 종교와 정치와의 관계부터 유연하게 되짚어 우리가 잊고 지나친 부분에 대한 순차적 복기로서 사회에서 희망하는 소통을 찾으려 한다. 지금까지 지구상에 살아온 현생 인류의 수를 1,080억 여 인으로 추정한다고 한다.

아마 지금이 제일 많은 사람들이 지구상에 있을 것이며 그동안의 역사로 인간은 수많은 소통의 시도와 과정으로서의 민주주의를 발전시켜 왔다. 동서고금의 세계 역사를 보았을 때 우리 인류는 종교를 토대로 경제와 정치, 사회와 문화를 이루기 시작하였다.

보편적인 의미로서 세계 역사 특성의 기원을 연대기적으로 나열하여 본다. 창조주께서 아브라함의 가정 공동체를 이스라엘 국가 공동체로 이루는 유대교의 태생 이후로, 자신의 소자아가 조물주의 대자아와 만나는 깨달음을 각의하신 석가모니 부처의 가르침이 불교로서 이루어졌다.

약육강식의 동양 고대 중국에서 인의예지치의 질서를 설파하신 공자의 행적이 유교가 되었으며, 사랑하는 자체를 사랑함으로 악처와 악법마저 사랑하여 서양 철학의 성현이 된 소크라테스 이후로 서양철학 사상이 세워지기 시작하였다. 유대교 메시아 사상의 상징성으로 하느님과 사람 사이의 심연을 메운 진리로서의 믿어지는 성자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사회성으로 그리스도교가 발생하였고, 예언자 무하마드를 통한 종교적인 열정으로서 진화되었지만 진리가 없는 급간에서 인성적 관점을 그대로 가지고 있는 이슬람 등이 세계 문화의 흐름을 형성하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또한 인내천 사상의 동학농민혁명의 기조인 천도교와 함께 소태산 교조의 깨달음으로 만물의 조화로운 질서를 드러내는 원불교 등이 있다. 이밖에 힌두교와 토속 신앙 등으로 세계 각지의 많은 종교가 있어오며 세계 역사에서 각각의 종교를 관점으로 이루는 사회 문화에서 서로의 고유한 이야기로서 인간의 양심을 상징하여 왔다. 각자 시간 속에서 늘 살아있는 이야기로 진리를 향한 선과 악을 분별하는 양심으로 서로 이어지며 모두와 하나 되도록 소통하는 방법으로서 종교를 바라볼 수 있을 것이다.

공짜와 당연한 것과 비밀이 없는 세상에서 어느 누구에게나 삶에는 편할 수만은 없는 생노병사의 수많은 질곡과 어려움이 있다. 욕심은 서로 다투며 드러내기 쉽지만 양심은 소통까지 끄집어내어야 하여 어렵지만 인간의 거룩한 자유의지는 용기의 희망을 늘 이루었다.

서로 사랑하는 양심을 통한 믿음의 눈으로 우리 사회를 바라보면서 소통하는 양심과 소유만 하려는 욕심을 분별할 수 있으며, 생명과 죽음을 나누는 지혜로서 다름과 틀림, 분별과 차별의 차이를 느끼고 이어지는 마음으로 강함과 악독함, 착함과 어리석음의 차이를 알며 빛과 어두움의 차이로서 지성에서도 지혜와 지식을 그리고 의지로서도 집중과 집착을 그리고 흐름으로서 과정과 결과를 나누어 사회적으로 지향할 수 있을 것이다.

종교적으로는 의인과 죄인, 그리고 선인과 악인의 다름을 통하여 천국과 지옥, 극락과 아수라를 분별할 수 있을 것이며 정치적으로는 정부와 정권을 그리고 지역정서와 지역감정의 차이를 알며 온전하게 지향할 수 있을 것이다. 소통의 눈으로 종교와 정치, 경제, 문화의 사회를 이루는 과정을 바라보면서 가장 종교적인 활동이 정치가 또한 가장 정치적인 활동이 종교가 될 수 있다는 유연한 지혜의 눈을 뜰 때가 되었다. 이견의 여지는 있을지라도 민주주의를 바라는 개인의 양심의 눈으로 우리 민족의 역사를 바라본다면 조선 시대 이전부터 국란을 극복한 의병정신의 민중의 양심이 있었고 임시정부로 독립운동을 한 민족의 양심이 4.19 혁명의 시민의 양심, 광주 민주화 운동의 행동하는 양심이 있었다고 할 수 있다. 6월 항쟁의 국민의 양심으로 국민의 정부와 참여정부가 열렸지만 이명박-박근혜 정권을 경험하였고 겨울 주말 밤거리를 메운 국민의 양심으로 이룬 촛불 혁명으로 연 문재인 정부는 남북 북미정상회담 등의 민족의 아픔을 치유하려는 민족화해 협력으로 평화통일로 다가가고 있다. 하지만 빈익빈부익부 자본주의의 이기적 욕심과 진보와 보수의 대립으로 극단 갈등에도 신음하는 지금이다. 보편적인 관점으로 본다면 조선시대 이전부터 민중의 양심을 탄압한 권문세족, 양반지배층, 친일파, 친제국주의와 군사-개발-자본 독재의 욕심과의 대치로서도 역사와 사회를 이해할 수 있다. 이긴다는 말뜻이 경쟁에서 상대방을 제압하는 뜻 이외에 어려움과 시련을 견디며 극복하는 과정 자체로 보는 뜻이므로 그 말 그대로 우리는 언제나 이길 수 있어온다. 더욱 소통하려는 정치 의지를 진보로, 소유를 합리화하려는 의지를 보수로 바라보는 관점으로서 지금 우리 주변 세계를 돌아본다면 미국의 트럼프와 중국 시진핑, 일본의 아베와 러시아 푸틴 등의 독재를 합리화하는 듯한 국제정치 흐름에서 우리는 보다 구체적인 소통의지로 깨어날 수 있을 것이다.

또 역사를 바라보는 절대적이고 영원한 시간의 관점으로는 사회의 소통을 통하여 인간의 수단만이 발전할 뿐 소통하는 양심과 소유하려는 욕심 사이의 선택의 시간으로 역사는 반복된다는 유연한 지혜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필자는 세계와 역사를 양심의 눈으로 바라보며 문화의 기원으로서 종교를 알고 보다 구체적인 양심의 눈으로 바라보면서 온전하게 분별하며 소통하기 위하여 하나의 가치기준을 용기를 내어 제시한다.

경제적인 활력이 필요한 부분이나 사회갈등을 풀어야 하는 부분에서 분명히 간과할 수 없는 부분, 바로 모두가 공감할 수 있고 수긍할 수 있는 정당성이 바로 이 소통이다.

각각의 종교도 결국은 우리 모두의 믿음으로서의 양심을 소통으로 지키며 서로 사랑하는 방법들이라는 믿음으로서 모두가 공감하기를 기원하면서 서로의 아픔을 치유하고 함께 돌보는 경제로 보다 풍요롭고 문화적으로 굳세고 사회적으로 윤택하여질 수 있어야 한다. 결국 온전한 선만이 악을 이길 수 있다. 온전한 용기의 믿음으로 소통의지인 민심이 그대로 반영되는 정치, 경제, 문화, 사회가 시작되도록 구체적인 담론을 위해 우리의 양심으로 행동해야할 지금이다.

유희석 기자  nickyoo2610@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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