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소 냉전의 시작, 민족의 비극 6.25 전쟁

박성남 6.25 참전유공자회 청주시지회장

제2차 세계대전이 일제강점기와 함께 막을 내린 후 미·소 양대 진영의 냉전의 시작이며 강대국의 대리전이 되었던 6. 25 전쟁은 독재에 맞선 4.19혁명과 5.16군사 쿠데타와 광주민주화운동 등 굵직굵직한 역사적 사건들과 함께 민중들의 눈물로서 기억되어 왔다. 힘없고 가난한 시절, 배고픈 삶 속에서 이데올로기의 각축장이 되어버린 한민족의 터전에서 살아온 우리 민족이 겪은 고통과 8.15 해방이후 남북의 분단으로 인한 아픔으로 베이비붐 이전 세대의 애환은 대한민국의 근현대사 속에서 시대의 비극을 고스란히 품고 있다.

6. 25 전쟁을 다룬 영화 "태극기 휘날리며"에서는 한 형제가 각각 국군과 북한군으로 징집되어 형제끼리 서로에게 총부리를 겨누게 되는 동족상잔의 비극을 잘 묘사해 대중들에게 큰 인기를 끌어 흥행에 성공하기도 했다.

 

전쟁에 대비해 굳건한 안보태세를 갖추도록 최선

6. 25 참전유공자협회는 6. 25전쟁의 역사적 의의를 되새기고 안보의지를 다짐하기 위해 설립된 단체이다.

6. 25 참전용사들로 이루어진 6. 25 참전유공자협회의 회원들은 치열했던 6. 25전쟁의 참화 속에서 살아남은 용사들이며 역사의 산 증인이다. 6. 25참전 용사들은 북한의 도발에 대비해 굳건한 안보태세를 갖추고 피땀 흘려 지킨 자유민주주의 대한민국을 지키는데 앞장서고 있다.

6.25 참전 유공자지회는 회원들의 친목도모와 복지증진에 이바지하며, 6. 25 전쟁의 역사적 교훈과 참전 기념사업 수행을 통하여 참전유공자의 명예 선양과 국민들의 호국안보 의식을 고취하고 자유민주주의 수호 및 국가발전에 기여함을 목적으로 하고 있다. 협회는 2001년 5월 16일 "사단법인 6.25 참전 전우 기념사업회"로 설립되었으며 초대회장으로는 유재흥회장이 추대되었다. 2004년 3월 26일에는 "사단법인 대한민국 6.25참전 유공자회"로 법인으로 인가받아 그 명칭을 변경하였으며 제2대 회장으로 채명신회장을 추대하여 협회를 이끌었으며 그 후 발전을 거듭하여 지금에 이르렀다.

청주시 참전유공자 기념탑에서 박성남 지회장 청소 모습.

6.25전쟁의 참상을 그대로 투영

6. 25 참전유공자협회 박성남청주지회장은 전쟁에 직접 참전하여 전쟁의 고통을 몸소 겪은 6. 25참전 용사이다.

김소월 시인의 대표작인 ‘진달래꽃’에서 등장하는 봄이면 진달래가 흐드러지게 피어나는 평안북도 삭주군 영변에서 4남1녀 중 셋째로 태어났다.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부모님과 중국 국경지대로 이사 간 후 중국 조선족 학교를 다녔으며 그 후 북한으로 돌아와 철도청 일을 잠시 배우다가 공부가 하고 싶어서 중학교에 편입하였다.

학교에 다니던 중 북한 공산정권이 들어서고 첫째 형이 이에 맞서 개벽 신문사에서 자유 민주주의 수호 운동을 하면서 김일성 암살을 모의하다가 밀고 되었다. 형은 사형 선고를 받고 투옥되었다가 무기징역으로 감형을 받았으나 전쟁 중에 행방불명되어 다시는 볼 수 없었다.

그 후 부모와도 헤어지고 다른 형제들과 연락이 끊겨 6. 25 전쟁 중에 부모 형제들과 모두 뿔뿔이 흩어져 이산가족이 되고 말았다. 전쟁으로 가족들과 생이별을 한 박 지회장의 삶은 6. 25 전쟁의 참상을 그대로 투영하고 있다.

 

“차별이 없이 공을 인정받고 함께 잘 사는 사회가 되기를”

박 지회장은 요즘 이슈가 되고 있는 미국과 일본의 관계에 대해 남다른 관심을 갖고 있다. 미국과 일본의 관계에 대하여 그는 “미국의 진주만 공습으로 6천명이 넘게 희생되고 세계 최초로 원자폭탄으로 전쟁을 끝냈어도 일본이 우리와 미국을 이간시키려 하는 것을 방관하고 미국은 미군 주둔비 등의 비용을 부담시키는 것은 서운한 일”이라고 말했다. 또한 “지금 한국에 새터민 3만 5천명, 그중에 6천명의 새터민이 충북에 살고 있는데 모두 이북에 고향을 둔 실향민이다. 한 민족으로서 안쓰러운 마음이 든다.

최근 한국에 정착한 새터민 한 가족이 과수원을 하며 잘 정착하고 있다는 신문 기사를 보고 반가웠다. 십 만 명이 넘었던 6. 25참전 용사들이 천 여 분으로 줄어서 이제는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우리가 있어서 나라도 살고 하는데 언제부터인가 6. 25 참전용사나 월남파병 고엽제 전우회등과 4.19혁명과 광주민주화운동 유가족 등의 대우가 차별되고 있다. 나라를 아끼고 위한 마음으로 살아온 선배들이 노인이 되어도 정파적 이해관계로 인한 차별이 없이 공을 인정받고 잘 돌보아지며 함께 잘 사는 사회가 되기를 간절히 바란다”고 말했다. 중국 조선족의 팔로군과 북한 인민군과 대한민국 국군의 삶을 모두 체험한 박 지회장의 삶은 가난과 비참함에서 벗어나려는 노력으로 세대를 거치면서 나아진 삶의 경제적 수준에도 불구하고 평화와 통일을 추구해야만 할 이유를 드러내고 있다.

박성남 지회장 부부가 청소후 명각비앞에서 단란한 모습.

전쟁의 상처만 남긴 채 6. 25전쟁은 역사 속으로

한편, 6. 25전쟁은 무방비 상태에서 북한의 기습 공격에 힘없이 당해야만 했던 안타까운 동족상잔의 비극이었다. 1950년 6월 25일 일요일 새벽 4시, 깊은 잠에 빠져있던 평화로웠던 한반도는 북한군이 끌고 온 총과 대포로 무방비 속에 당하면서 6월26일 아침 8시 50분에는 북한의 도발로 의정부를 빼앗기고 말았다.

남한은 무력으로 전면 기습한 북한군에게 마침내는 6월 28일 수도서울까지 점령당하고 말았다. 정부와 국민들은 집과 전답을 버리고 인민군을 피해 부산으로 피난을 하기에 이르렀으며. 이후 UN의 개입으로 전세가 불리해진 공산군 측의 요청으로 1951년 6월부터 휴전회담이 개시되었고 1953년 7월 27일 마침내 정전협정을 맺으면서 전쟁은 종식되었다. 6. 25전쟁은 조국이 남북으로 분단되는 아픔을 겪으면서 전쟁의 상처만 남긴 채 역사의 기록으로 남게 되었다. 참혹한 전쟁은 320만 여명의 피난민과 30만 여명의 전쟁미망인, 10만 여명의 전쟁고아와 천 만 명의 이산가족을 만들면서 남북한의 대립은 끝이 나고 이산가족의 아픔은 그때부터 시작되었다. 조국이 둘로 나뉘는 분단의 아픔을 겪었을 뿐만 아니라 전쟁에 직접 참가하여 청춘을 바쳐야 했던 수많은 6. 25 참전용사들은 오늘도 참혹한 전쟁의 아픔을 안고 살아가고 있으며 한 동포끼리 목숨을 빼앗으며 전우가 옆에서 죽어가는 고통스런 장면들을 순간순간 떠올리며 살아가고 있다. 하지만 국토를 지키기 위해 목숨을 걸고 전쟁에 참가한 참전용사들은 70~80%가 최저생계비로 궁핍한 생활을 이어가고 있다.

참전유공자의 희생과 헌신에 대한 감사하기 위해서라도 참전유공자 예우법률 개정이 시급해 보인다. 6. 25 참전 용사는 평균 나이가 89세이며 매월 약 10여명씩 세상을 떠나고 있고 향후 5년 후면 거의 다 돌아가신다는 결론에 이른다.

이들의 업적을 기리고 그들의 후손들이 유공자회 단체를 잘 보존할 수 있도록 국회에 계류 중인 국가유공자 예우 법률 개정 설립법이 잘 통과되길 바란다.

국가유공자 명패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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