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문화재 11건(유형9, 무형2), 경기도문화재 28건(유형25, 무형3),

홍성준 양주문화원장

양주시 향토유적 15건(유형14, 무형1) 등 총54건의 문화재를 보유

문화원은 각 지방의 향토문화 창달을 위해 일정한 시설을 갖추고 문화 및 사회교육사업을 실시하는 비영리 특수법인단체이다. 우리나라 최초의 문화원은 1947년 설립된 강화문화원이고 일제와 6.25전쟁으로 파괴되고 손상된 민족 문화의 정체성을 되살리고 계승하는데 주도적인 역할을 하면서 지역문화를 진흥시키는데 크게 기여하고 있으며 전국에는 현재 231개의 문화원이 있다. 양주문화원은 1961년 3월 5일 양주군 이담면(현재의 동두천시)에 양주문화원으로 개원하여 첫째, 양주의 전통문화의 전승. 계발. 보전. 보급 및 선양 둘째, 향토사의 발굴. 조사. 연구 및 자료의 수집. 보존 셋째, 지역문화 행사 개최 및 문화활동 사업을 수행해 왔다. 1981년 6월 30일에 양주군 동두천읍이 동두천시로 승격하여 동두천문화원과 분리되면서 그 활동이 유명무실하다가 지역의 어르신들이 뜻을 모아 1987년 4월에 재창립총회를 하고 1988년 2월에 문화공보부장관의 설립허가를 받아 그해 12월에 양주시 광적면에 현재의 문화원을 개원을 하게 되었다.

 

양주시의 유래 및 역사적 의미는?

양주는 지리적으로 한반도의 중심부에 자리 잡고 있고, 양주 지역의 남쪽과 북쪽을 흐르고 있는 한강과 임진강은 수로에 근거한 교통의 편리함, 풍부한 수자원, 광활한 평야라는 지리적 이점 때문에 군사적 쟁탈전이 빈번 하였고, 그 역사적 중요성이 일찍부터 부각되었다. 이러한 경기도 양주시의 역사를 삼국 시대, 고려 시대, 조선 시대, 근대, 현대로 나누어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삼국 시대 / 고구려·백제·신라 가운데 양주 지역 일대를 처음으로 확보한 국가는 백제였다. 백제 최초의 도읍지였던 하북위례성(河北慰禮城)의 위치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있지만,『삼국사기(三國史記)』백제본기에 ‘백제 개루왕(蓋婁王) 5년(132년)에 북한산성을 쌓았고, 개로왕(蓋鹵王) 15년(469년)에 북한산성에 병사를 주둔시켰다’고 하는 기록으로 보아 양주지역으로 보인다.

475년 고구려 장수왕의 남진 정책이 본격화되면서 양주는 고구려의 영토가 되었다. 당시 고구려는 현재의 양주시 일대를 매성(買城)[혹은 매성(買省)], 마홀(馬忽)로, 은현면과 동두천시 일대를 내을매(內乙買) 혹은 내이미(內爾米)라고 불렀으며, 남면 일대는 칠중성(七重城), 남양주 일대는 골의노현(骨衣奴縣)이라 불렀다. 원래 ‘매성’ 이란 고구려말로 ‘맷골’ 혹은 ‘물골’로서 수성(水城)을 의미한다. 매성은 매초성(買肖城) 과 통하며, 신라가 통일을 완성하기 위해 전쟁을 벌였던 매초성이 바로 지금의 양주 지역이다. 삼국을 통일한 신라는 경덕왕 16년(757년)에 매성을 내소현(來蘇縣)으로, 내을매를 사천현(沙川縣)으로, 골의노현을 황양(荒壤) 혹은 풍양(豊壤)으로 바꿔 불렀다.

현재 양주시 유양동과 어둔동, 백석읍 오산리에 걸쳐 있는 양주 대모산성(大母山城)에서 출토된 백제 토기편과 신라와 통일 신라의 유물들, 그리고 천보산과 불곡산·도락산 일대에 산재하는 고구려의 군사용 보루 유적을 포함한 관방 유적들은 양주 지역이 아주 중요한 전략적인 요충지였음을 입증해 준다.

고려 시대 / ‘양주’라는 이름이 처음 나타나는 것은 고려 초기인데, 이곳은 오늘날의 양주시 지역 일대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북한산과 한강으로 둘러싸인 지역, 즉 오늘날의 서울 사대문(四大門) 안쪽 일대를 가리키던 이름이었다. 즉,고려 시대의 양주는 통일신라시대에 북한산 일대에 조성된 행정 구역이라 하여 북한산주(北漢山州), 혹은 한강 이북에 있다 하여 한양군(漢陽郡)으로 불리다가 태조 23년(940년)에 한양군을 양주라 개칭하였다. 이후 983년(성종 2)에 지방의 주요 거점 도시를 의미하는 12목(牧)의 하나로 편성되었고, 1018년에 견주 (見州)·사천현(沙川縣)[지금의 동두천시, 양주시 회천동·은현면 일원)·풍양현(豊壤縣)[지금의 남양주시 진건면·진접읍 일원]이 양주의 속현이 되었으며, 1067년(문종 21)에는 남경(南京)으로 개칭되었고, 1099년(숙종 4)에는 수도를 남경으로 옮기려고 양주에 새로운 궁궐을 짓기도 하였으나 실행되지는 않았으며, 1308년(충렬왕 34)에는 다시 한양부(漢陽府)로 개칭되었다. 고려 시대 전 시기에 걸쳐 양주는 지금의 양주시가 아닌 현재의 서울 중심지를 가리키는 명칭이었고, 현재의 양주시 지역 일대는 견주로 불리고 있었다.

 

조선 시대 / 1392년 새롭게 조선 왕조를 개창한 태조 이성계는 고려 후기까지 ‘양주’로 불리던 한양부를 새로운 수도로 선정하였다. 새로운 수도가 한양부에 설치되자, 한양부 가운데 수도에 편제되지 않은 지역은 옛 양주를 계승하는 지역이라 하여 그대로 ‘양주’라는 이름을 사용하였으며, 이때부터 양주의 중심지도 오늘날의 양주시 일대로 옮겨가게 되었다. 이러 한 내용은『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에 자세히 실려 있다.

새로운 수도의 건설과 함께 양주군으로 강등되었던 양주 지역은 1395년에 양주부(楊州府)로 승격하였고, 1397년에는 치소를 견주 지역, 즉 오늘날의 양주시 고읍동 일대로 이전하였다. 1413년(태종 13)에는 양주도호부(楊州都護府)로, 다시 1466년(세조 12)에는 양주목(楊州牧)으로 승격되었다. 1504년(연산군 10)에는 양주에 국왕의 무예 연마를 위한 수렵장 조성을 위해 일반인들의 접근을 막는 금표(禁標)를 설치하여 양주목이라는 행정 구역을 소멸 시키기도 하였으나, 1506년(중종 원년)에 양주목으로 다시 부활되었고 치소는 오늘날의 양주시 유양동에 동헌과 더불어 향교와 사직단, 그리고 각종 건물을 새로 조성하였다.

근대 / 1895년(고종 32) 칙령 제98호에 따라 조선의 지방 행정 구역은 크게 변화되었다. 당시 양주목은 경기 소속의 3등군(三等郡)인 양주군으로 강등되었으며, 1922년에는 군청사가 양주군 주내면 유양리에서 시둔면 의정부리[지금의 의정부시]로 이전되었다.

현대 / 해방 이후 양주 지역은 많은 지역이 시(市)로 분리 독립되어 현재와 같은 지역만 남게 되었다. 의정부시, 동두천시, 남양주시, 구리시, 서울시의 도봉구,강북구,노원구,중랑구 등이 양주 지역에서 분리 독립된 지역이다.

1946년 파주군 남면이 양주군에 편입되었으며, 1963년 이담면(伊淡面)이 동두천읍으로 승격되었고, 의정부읍이 시로 승격·분리되었으며, 노해면(蘆海面)과 구리면 5개리가 서울특별시에 편입되었다. 1980년에 양주군 관할구역 중 구리읍·미금읍·별내면·진접면·진건면·수동면·화도면·와부면이 분리되어 남양주군이 신설되었으며, 1981년에는 동두천읍이 시로 승격·분리되었다. 2000년에 군청사를 의정부에서 현 남방동으로 이전하였고, 2003년 10월 19일에 1읍 , 4면, 6동의 도농복합시인 양주시로 승격하였고 현재 22만명의 중견도시로 성장하였다.

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양주는 1395년 태동이래 2018년 현재까지 623년의 역사를 가진 도시로 서울동북부 4개區(도봉·노원·강북·중랑) 및 경기동북부 4개市(의정부,동두천,남양주, 구리)의 본가로 경기북부의 중심도시이다. 조선시대에는 수도인 한양 근처에 있었기 때문에 정치.경제.군사적으로 요충지 였으며 왕릉 및 왕실의 무덤이 즐비한 곳이며, 현재도 수도 서울을 방위하는 군사요충지(5개 사단 주둔)이며, 시민과 함께 신성장. 새지평이라는 슬로건 아래 더불어 잘사는 복지도시, 시민이 우선인 안전도시, 희망찬 내일의 교육도시, 새로운 성장의 경제도시, 모두가 누리는 문화도시, 시민이 주인인 감동도시를 추구하는 인구 30만의 중견도시로 성장하고 있는 도시이다.

양주시의 대표적 문화재와 전래되어 오고 있는 주요 행사는?

양주시는 풍부한 유·무형문화재를 보유한 ‘멋’과 ‘흥’의 문화도시이다. 양주시는 국가문화재 11건(유형9, 무형2), 경기도문화재 28건(유형25, 무형3), 양주시향토유적 15건(유형14, 무형1) 등 총54건의 문화재를 보유하고 있다.

대표적인 문화재로는 양주별산대놀이(국가중요무형문화재 제2호),양주소놀이굿(국가중요무형문화재 제70호), 양주상여와 회다지 소리(경기도 무형문화재 제27호), 양주농악(경기도 무형문화재 제46호), 나전칠기장(경기도 무형문화재 제24호), 회암사지(사적 제128호), 온릉(사적 제210호), 양주대모산성(사적 제526호) 등이 있다.

별산대놀이, 소놀이굿, 상여와 회다지소리, 양주농악 등 무형문화재는 보존회에서 매년 5월에 정기공연을 하고 있으며, 매년 개최하는 양주회암사지 왕실축제 때는 위의 4개단체외에 양주들노래가 합세하여 5개 단체가 합동공연을 하여 한자리에서 양주의 대표적인 무형문화재 공연을 감상할 수 있다. 또한 중종의 원비인 단경왕후 신씨의 능인 온릉에서도 매년 후손들이 제향을 올리고 있으며, 대양주권의 유일한 양주향교도 매년 봄·가을에 석전대제를 올리고 있다. 또한 유양동에 조선시대 양주목(楊州牧)의 치소로서 1506년(중종 1)부터 1922년까지 417년간 양주목의 중심지였던 양주관아(楊州官衙)가 올봄에 복원(양주목사의 집무실인 동헌(東軒)과 내아(內衙),부속건물 등 9개 시설)되어 근처에 있는 양주향교와 더불어 시민과 불곡산을 찾는 관광객에게 양주의 새로운 명소가 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양주문화원 주요사업은?

역사문화대학 / 전국에서 유일하게 3년 과정으로 운영하고 있으며, 우리의 소중한 문화유산인 역사유적을 답사. 탐구하여 조상의 슬기와 얼을 계승하고, 이를 바탕으로 양주의 문화유산에 대한 올바른 이해를 도모하고 나아가 양주를 대표하여 유구한 양주의 역사전통을 대내외에 홍보함으로써 사라져 가는 역사문화 유적을 지키고 알리는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3년 동안 22회 강의와 22곳을 답사하는 교육과정으로 편성되었으며, 2001년제1기를 시작으로 현재18기생을 운영하고 있으며, 2017년까지 393명의 수료생을 배출하였다. 현재 양주시의 문화관광해설사로 많은 분들이 활동을 하고 있다.

찾아가는 문화유산 / 양주문화유산 답사를 통해 양주의 유구한 역사와 찬란한 문화유산을 올바르게 교육시켜 내고장 문화의 우수성을 인식하는 프로그램으로 우리 고장에 대한 역사와 문화를 접하게 함으로써 양주에 거주하는 학생과 시민에게 애향심과 자긍심을 갖도록 하고 있다. 2017년에 700명, 2018에 1,200명의 학생과 시민이 참여하였다

 

지역 인물 학술심포지움 및 서예대전 / 학술심포지움은 매년 한 명의 지역인물을 선정하여 그 분의 생애와 업적을 재조명하여 우리 고장의 문화와 역사를 연구하여 향토의식을 제고시키는 사업으로, 2016년 월정 윤근수, 2017년 휴암 백인걸 선생을 탐구하였으며, 2018년 가을에 약창 박엽 선생에 대한 심포지움을 개최할 예정이다.

서예대전은 우리 전통예술인 서예의 저변확대와 유망한 신인을 발굴. 육성하기 위하여 2017년부터 시작한 사업으로 작년 1회 때 130여점의 우수한 작품이 출품되어 성공적으로 행사를 하였고, 금년에도 사업규모를 확장하여 가을에 개최할 예정이다.

 

회암사지 왕실문화 축제 / 양주시와 우리 문화원이 공동주관하는 행사로 ‘태조 이성계의 치유의 궁궐’인 회암사지를 무대로 펼쳐지는 역사문화축제이다. 休(쉼)와 Healing(치유)의 감동을 선사하고 품격 있는 조선의 왕실문화를 체험할 수 있는 지역주민과 함께하는 시민 참여형 축제이다. 메인행사로 왕의 행렬을 재현하는 ‘어가행렬’과 양주의 5개 무형문화재단체의 합동공연, 국악단의 궁중음악 공연 그리고 왕실체험프로그램이 펼쳐진다.

이밖에 문화학교프로그램으로 서예. 생활명리, 민요장구, 기타, 수묵화 등을 운영하고 있으며, 문화체육관광부와 한국문화원연합회 공모사업인 어르신문화프로그램으로 맹골마을에서 전통주 만들기 프로그램도 운영 중이다.

홍성준 원장 임기내 가장 역점을 두는 사업은?

임기 내 역점사업으로는 문화원사 이전과 양주시지 편찬 사업을 꼽을 수 있다.

문화원사 이전 사업 / 현 문화원사는 1991년에 건축한 건물로 노후화로 인하여 건물에 균열이 생기고 냉·난방기교체비용 및 전기설비 교체비용 등 유지보수 비용이 지속적으로 과다하게 발생하고 있다. 또한 공간도 비좁아 제대로 된 교육장 확보도 할 수 없어서 타 기관의 공간을 임대하여 사용하고 있는 실정이다.

지리적으로도 양주시에서 인구가 적은 서부권에 위치하고 있고 대중교통도 편리하지 않아 전체 양주시민이 이용하기에는 접근성이 떨어져 문화원에서 추진하는 제반 사업에 시민 참여가 쉽지 않아서 사업의 효율성이 크게 떨어지고 있다. 상기와 같은 이유로 현 문화원사의 이전이 시급하며, 양주문화원이 양주시의 전통문화를 이끌어 가고 양주시민들에게 문화향유의 기회를 넓혀가기 위해서는 임기내에 시민이 편리하고 쉽게 이용할 수 있는 접근성이 편리하고 시와의 업무협조도 용이한 시청주변으로 문화원사의 이전를 추진하고 있다.

 

양주시지 편찬 사업 / 향토지 성격의 학술지인 시지는 지방자치단체에서 대개 15~20년 주기로 발간되고 있다.

양주는 1978년에 처음으로 군지를 발간하고 1992년에 두 번째 군지를 발간한 이후 시로 승격한지 15년이 지난 현재까지 시지 발간이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시지는 과거와 현재를 집대성하고 발전적 미래를 설계할 수 있는 소중한 자료로서 편리성보다는 사료적. 학술적 측면이 강조되고 중요시 되어야 한다. 따라서 시지를 발간해야 한다는 공감대와 필요성이 대두되었고 지금부터 준비해야 시승격 20주년이 되는 2023년 이전에 발간할 수 있어 임기내에 시지 발간 작업을 추진하고 있다.

한편 홍성준 양주문화원장은 경기도 양주시 남면에서 출생하여 지역에 있는 남문농업고등학교을 졸업하고 고려대학교 언론대학원 연구과정을 수료하였으며, 남면체육회장. 남면농촌지도자회장. 남면농협 이사, 감사를 거쳐 남면농협 조합장을 역임하는 등 농업관련 단체를 이끌면서 지역의 농업 발전에 이바지 하였다.

시 단위단체로는 양주시선거관위원. 양주시민주평통협의회장. 양주경찰서 경찰발전위원회 위원장을 역임하는 등 다방면에 걸쳐 양주시의 발전을 위해 봉사활동을 하였다.

저작권자 © 뉴스매거진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