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인지해 심해야 (欺人之害 心害也)

여조겸(여백공) 초상

속임을 당했을 때의 피해는 몸으로 받는 손해 이지만

사람을 속였을 때의 피해는 마음을 상하는 해가 된다.

이 말은 송나라 시대의 유명한 학자로 알려진 여조겸(呂祖謙: 1137-1181)의 글에 나오는 구절이다. 그는 학덕이 높다하여 후세 사람들은 그를 경칭해서 동래선생(東萊先生)이라 불렀다고 전해지고 있다. 동래라는 것은 그의 조부인 동래후(東萊候) 가문의 후예라는 의미가 담겨있다.

필지가 여러 곳의 자료를 찾다가 우연히 여조겸 성생의 기록문을 발견했다.

그간 기인 기세 기천(欺人 欺世 欺天) 등 구절을 많이 접해 보았지만 기인지해 심해야(欺人之害 心害也)라는 글귀를 접하는 순간, 참으로 경탄했다. 가장 놀랍고도 무섭게 정곡을 찔렀기 때문이다.

남에게 욕설을 하기 위해서는 먼저 내 입을 더럽혀야 한다는 경고의 글을 읽은 적은 있지만. 이번 여조겸 선생의 글처럼 심금을 울려 받기는 처음이다.

더욱이 위의 글귀에서 심해(心害)의 뜻은 독자들의 마음을 더욱 놀라게 하고 있다. 심해(心害)는 곧 심사(心死)라는 것이다. 그것은 애막대어심사 신사 차지(哀莫大於心死요 身死는 次之라)고 한 말이 뒤 받치고 있다. 다시 말하면 사람을 속인다는 것은 나의 마음을 죽이는 것이라는 뜻이다. 이 세상에서 더 크다고 말할 수 없는 슬픔은 마음이 죽는 일이라 했다.

그리고 우리들의 육신이 죽는 다는 것은 마음 다음 가는 슬픔에 해당할 뿐이라 했다. 그의 말을 몇 번이고 되뇌어 생각해 보아도 굉장한 진언(眞言)임에 틀림이 없다. 왜냐하면 누구의 경우를 막론하고 자신이 운명(殞命)하는 순간에는 스스로의 죽음을 애통해 할 겨를이 없다.

이 순간 명심보감의 한 글귀를 회상해 본다. “인지장사에 기언야 선(人之將死 其言也 善)”이라는 구절이다. 일평생 살인강도를 일삼던 “갱”의 두목도 죽는 순간에는 인간 본심에서 우러나는 진실을 말한다고 한다. 자신의 죽음을 통곡하는 이는 거의 없다.

여기에서 우리는 함께 뉘우쳐야 할 일이 있다. 그것은 첫째, 사람을 속여 보았을 때 뼈저리게 회계해 본 일이 있는가? 둘쩨, 의식적으로 사기 및 기만행위를 범했을 때 나의 마음은 사망할 것이라고 슬퍼해 본 적이 있었는가? 물론 이는 어디까지나 가정적인 자문자답(自問自答)이다.

명나라 시대 학자로서 유명했던 여고(呂坤)는 그의 신음어(呻吟語)라는 명저에서 이르기를, 사람은 누구나 “눈에 들어간 티 하나도 용납하지 않고(目不容一塵), 아빨 새에 낀 음식 찌끼 하나도 용납하지 않는다(齒不用一芥).고 했다. 그러면서도 자신의 양심을 침범하는 크고 작은 비리 부정 사건의 연루 유혹은 뿌리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고 했다. 바꾸어서 말하면 나의 마음을 사망케 하기 위한 온갖 비리 부정의 위협은 별로 걱정스러워하지 않고 도리어 관용하는 경우가 많다는 것을 지적하고 있다.

앞에서 언급했던 여조겸의 심해설(心害說)은 바로 그 같은 사례를 심사(心死)의 사건으로 다루려는 것이다. 여곤(呂坤)도 동일한 시각에서 고독(苦毒)과 감독(甘毒)이라는 경구를 더 붙여 놨다. 즉 고독은 귀에 쓰디 쓴 충고의 고언(苦言)을 의미하며 감독은 받아 챙기기에 달콤한 뇌물수수의 음성거래를 의미한다. 한마디로 말해서 고독은 충직한 관료를 길러낼 수 있지만, 감독은 양리(良吏)도 멸망으로 유도하는 살인마의 손길과도 같다.

그것이 달콤한 감독(甘毒)인 것이다. 마음의 사망선고는 꿈속에서 저승사자가 찾아오듯이 다가오는 것이 아니다. 마음을 방산(放散)하는 가운데서 그 빈틈을 타고 침투하는 과향풍(果香風)처럼 오관을 자극하는 데서 비롯된다. 순간적 선택을 경계하라는 옛 분들의 귀띔에서 배울 수 있는 교훈이 아닐까 한다. 이 귀중한 기인심해(欺人心害)의 경구를 한 번 더 새겨본다.

김유혁 단국대학교 종신명예교수. 석좌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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