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설(傳說)의 프로복싱 챔피언 장정구

대한민국 복싱 사상 최초로 WBC 명예의 전당에 입성하는 쾌거를 이룬 복서 장정구는 1983년에 WBC라이트 플라이급 세계챔피언 타이틀을 획득했으며 WBC가 선정한 ‘위대한 복서 25인’에 한국인 최초로 당당하게 이름이 올라가 있고 1988년에 ‘15차 세계 챔피언 타이틀 방어’에 성공을 한 후 명예롭게 은퇴(隱退)를 했다. 사각의 링을 평정한 그의 삶은 그야말로 한편의 드라마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데 불굴(不屈)의 인파이터 파마머리와 ‘짱구’라는 별명으로 우리에게 더 친근감 있게 다가온 그의 삶을 조명(照明)해보자 한다.

 

가난을 극복하기 위해 복싱에 입문하다.

장정구 선수의 고향은 대한민국 제2의 수도 부산이다. 그는 부산의 아미동 빈민가에서 태어났으며 살아남기 위해서 무엇인가를 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일찌감치 권투를 시작했다. 정말 어려웠던 유년 시절을 보내면서 12살에 단돈 1500원을 어머니에게 힘들게 받아 ‘극동체육관’에 입문하게 된 것이 복싱을 시작하게 된 계기(契機)이고 어린나이에 운동하는 것을 기특하게 본 체육관 선배들의 눈에 띄어 시간 날 때마다 복싱기술을 하나씩 전수받았고 운동신경이 남다른 그는 누구보다 빠르게 성장할 수 있었다. 급기야 14세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아마추어 복싱에 데뷔할 수 있었으며 당해에 ‘아마추어 최고선수권대회’에서 준우승을 거머쥐었고 이듬해에 ‘부산신인선수권대회’에서 우승의 쾌거를 누렸으며 78년에 전국체전 고등부 출전을 권유(勸誘)받아 기량(伎倆)을 발휘하려 하였으나 초등학교 졸업이 학력의 전부인 그에게는 부정선수라는 오명과 함께 출전을 거부당하고 만다. 그러나 결코 포기하지 않고 다음해인 79년에 만 16세의 나이로 전국체전 부산예선 ‘일반부’에 출전을 하였고 라이트 플라이급에서 우승을 거머쥐게 된다. 80년 전국체전 부산예선에서 우승을 하고도 본선 출전권이 편파적인 협회의 판정으로 주어지지 않자 더 이상의 미련을 두지 않고 약 5년간의 아마추어 생활을 마감하고 프로복서로 전향을 하게 되는데 프로데뷔를 위한 준비 당시에 ‘소매치기복서’로 유명한 ‘고(故) 김성준’의 스파링 파트너로 놀라운 실력을 보여주면서 복싱계의 대모(代母)인 ‘심영자’의 귀에 들어가 후원을 받는 계기(契機)를 마련한다.

 

프로복싱의 황제(皇帝)로 등극(登極)하다.

데뷔전은 프로복싱 스타들의 등용문(登龍門)으로 일컫는 ‘MBC 신인왕전’이었는데 데뷔전을 포함하여 6연승을 질주(疾走)하며 해당 체급 우승과 우수 선수로 선정되었으며 82년 7월까지 18연승을 질주한다. 복싱계의 대모(代母)인 ‘심영자’의 후원을 등에 업고 열심히 연습하는 그에게 부상이라는 악재(惡材)가 다시 한 번 겹치게 되는데 다름이 아니라 어린이 대공원 잔디밭에서 맨발로 스트레칭을 하던 중에 손가락만한 유리조각을 밟게 되고 부상을 입게 된다. 부상이 완치되지 않은 상태에서 82년 9월 18일에 ‘일라리오사파타’와 WBC 세계복싱 타이틀을 놓고 격돌(激突)하게 되는데 15라운드 판정패를 당하고 만다. 지금도 장정구 선수는 “당시의 패배가 없었다면 세계타이틀 15차 방어는 결코 성공하지 못했을 것이다.”라고 그때의 기억을 회상(回想)하면서 힘주어 말한다. 경기패배 이후 6개월 만에 재도전을 성사시켜 놓고 그 기간 동안 와신상담(臥薪嘗膽)하면서 ‘지옥훈련’과 함께 패배한 경기를 하루에 수차례씩을 보면서 비디오 분석(分析)과 판독(判讀)을 통해 완벽하게 거듭날 수 있었으며 이때부터 반드시 시합 전에 상대 선수를 완벽하게 분석하는 습관을 갖게 되었고 ‘세계복싱의 전설’이 될 수 있는 자신을 만들어가게 되었다고 회상(回想)한다. 결국 6개월 뒤에 다시 만난 리턴매치에서 ‘일라리오사바타’를 일방적으로 몰아붙여 3회 TKO로 승리하며 83년 3월 26일 ‘WBC라이트 플라이급 챔피언’의 왕좌(王座)에 등극하게 된다. 당시의 한국은 복싱세계챔피언이 전무한 상태였고 ‘군부독재정권’시절이라 어쩌면 암울한 시대의 진정한 챔피언을 국민 모두가 갈망하던 차에 전형적인 투사(鬪士)기질을 갖추고 공격적인 복싱을 구사하는 장정구 선수가 국민들의 우상(偶像)이었으며 희망(希望)이고 위안(慰安)이 되었다. 장정구 선수의 세계타이틀 방어기록은 당시 일본의 복싱 영웅 ‘구시켄요코’가 가지고 있던 세계타이틀 방어 13차를 넘어서 15차를 성공시킬 정도의 대기록으로 ‘WBC 명예의 전당’에 기록되어 있고 현재까지도 실시간으로 운영되는 ‘복싱사이트(boxrec)’에 복싱 역사상 가장 강한 상대선수들을 공격적인 복싱으로 이겨낸 ‘최고의 선수’로 회자(膾炙)되고 있다.

피와 땀으로 수성(守城)을 준비한 챔피언

그에게 가장 힘들었던 방어전을 묻자 84년 8월18일에 포항에서 열린 ‘도가시키가쓰오’와 4차 방어전을 꼽았는데 “당시에 무려 14kg을 감량해야 했고 찜통더위로 운동이 너무 힘들었지만 비겁한 챔피언이라는 말이 듣기 싫어서 어느 때보다 열심히 연습을 했고 더욱이 경기일정이 광복절(8.15일) 바로 며칠 뒤인 8월 18일인지라 여기서 지면 맞아 죽을 것 같았습니다.” 라고 말하며 그때 장면을 떠올리게 한다. 도전자인 ‘도카시키가쓰오’는 전(前) 세계챔피언 ‘김환진’에게 챔피언타이틀을 빼앗은 후 일본열도에서 다시 ‘김환진’의 도전을 저지한 선수인데 장정구 선수는 14kg의 무리한 감량과 탈진 증세에도 불구하고 9회 TKO로 방어를 성공하고 국민들에게 ‘복싱영웅’이라는 칭호를 받을 정도로 다시 한 번 열화(熱火)와 같은 인기를 한 몸에 받는다.

 그때 장정구 선수의 경기장면을 보면 승리 직후 그 자리에 주저앉아 울면서 엎드렸고 인터뷰 내용을 보면“ 너무 힘들어서 경기를 끝내고 울기도 했지만 너무 땀을 많이 빼서 눈물도 나오지 않을 정도였습니다.”라고 말할 만큼 방어전을 위해 혹독한 훈련을 했음을 짐작하게 만든다. 그는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유일무이(唯一無二)한 전설의 인파이팅(Infighting)복서’이다. 장정구 선수에게 타이틀을 빼앗기 위해 일본은 혈안(血眼)이 되었고 심지어 멕시코에서 ‘헤르만 토레스’라는 선수를 수입하여 3차례의 도전(挑戰)을 시도하였지만 결국 챔피언 획득에 실패를 하였으며 일본 언론이 대서특필(大書特筆)하면서 “수 백 년 만에 하나 나올까 말까한 공격적인 인파이팅(Infighting)을 주 무기로 하는 천재복서!”라고 극찬(極讚)한 ‘오하시히데유키’는 첫 회 도전에 실패하자 장정구 선수의 마지막 타이틀 방어전인 15차 방어전(防禦戰)을 일본으로까지 끌어들여 챔피언을 탈환하기 위해 악착 같이 기를 쓰고 노력했지만 8회 TKO로 나가 떨어졌다. 장정구 선수가 다른 챔피언들과 다른 점(點)을 살펴보면 승리만을 계산에 넣고 소극적인 방어전(防禦戰)을 펼치거나 비겁하게 경기를 치르지 않고 도전자보다 더욱 적극적인 자세(姿勢)로 공격적인 복싱을 구사했다는 점이고 또한 방어전을 치른 상대들이 강하기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노련한 전직 챔피언이나 장정구 선수가 은퇴한 후에 세계 챔피언이 되었다는 점 등을 고려(考慮)할 때 어떤 선수나 챔피언들과도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한국을 대표하는 ‘전설의 복서’라는 데 대하여 복싱전문가를 포함한 국민 어느 누구도 이견(異見)을 달지 못하리라 본다.

전인욱 회장, 장정구 챔프, 이춘길 교수

'장정구 챔프 명예의 전당 건립’이 소원

장정구 선수는 부모님이 북한에서 6.25 동란 이전에 남한으로 일찌감치 내려온 덕분에 부산이 고향이 될 수 있었다고 살짝 웃는다.  2남 3녀 중에 막내 아들이었지만 지독하게 가난했던 어린 시절을 보냈다고 회상하는 것을 보면서 아버지에 대한 기억을 묻자 ‘유독 예의범절(禮儀凡節)을 따지시는 무서운 분’이라는 말과 함께 청소년시절 체육관을 끝내고 집으로 돌아올 때 “돌아가신 아버지가 항상 부르시는 것 같은 느낌을 받을 때가 많았다.”고 말한다.  장정구 선수의 마지막 소원(所願)은 부산에 ‘장정구 명예의 전당’을 건립(建立)하는 것이고 아버지의 고향인 북한 땅에 ‘장정구 복싱체육관’을 세워서 후진을 양성(養成)하는 것이라고 한다. 그리고 스포츠계에 보이지는 않지만 만연한 부정과 부패 그리고 판정의 시비 등 잘못된 관행(慣行)이 하루빨리 사라지기를 희망하며 프로복싱의 부활(復活)을 간절히 바라고 있다.

재도약을 위한 소중한 인연(因緣)

그는 어려서부터 자신을 돌봐준 ‘이윤식 선생님’을 최초의 고마운 분으로 기억하고 있다. 그분이 아니었다면 틀림없이 잘못된 길로 들어섰을 것이라고 말할 줄 아는 보은(報恩)의 미덕(美德)을 갖춘 스포츠맨이고 누구보다 우정을 중요시하는 가슴 따뜻한 사나이다. 그리고 흑과 백이 확실하면서 옳고 그름이 분명한 성격의 소유자이다. 필자에게 소중한 인연(因緣)들을 소개하면서 이춘길 교수와 전인욱 회장과 함께 분신(分身)과 같은 우정을 나누고 산다고 자신감 있게 대답한다. 그들은 장정구 챔피언과 30년 지기(知己)의 소중한 벗들이다. 벗들은 사뭇 조심스럽게 이야기 하기를 “위대한 장정구 챔프가 사각의 링에서는 단 1%도 부족함이 없는 불멸(不滅)의 복서였지만 사회라는 복잡다단한 링에서는 경험부족으로 인해 맞봐야 했던 실패와 좌절 그리고 시련이 현재까지 진행되고 있는 것에 안타까움을 금하지 못하고 있습니다.”라고 힘주어 대답을 한다. 위대한 챔피언의 방심(放心)과 사회의 처절한 경쟁(競爭)에서 놓치기 쉬운 부분을 중년의 벗들이 의기투합(意氣投合)하여 장정구 선수의 위대한 가치(價値)와 이미지를 훼손(毁損)하지 않고 보존하기 위해 오랜만에 자리를 함께 했다. 그들의 우정(友情)이 언제가 빛을 발하는 날이 온다면 장정구 챔피언은 다시 한 번 사각의 링이 아닌 사회라는 링에서 ‘인생의 챔피언’으로 도약(跳躍)할 것으로 믿어 의심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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