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 불이선언 위현 人不以善言爲賢 사람은 잘 떠버린다 해서 어진 이가 되는 것 아니다

이글은 전국시대 도가(道家)에 속하는 장자(莊子)의 문집에서 나온다. 금년은 무술년(戊戌年)으로서 개띠 해에 해당하기 때문에 장자의 말을 빌려서 한 마디 남길까 한다. 장자가 남긴 시구(詩句)중에 이런 것이 있다. 퇴보원래시향전(退步原來是向前)이라, 뒷거름 친다는 것은 원래 이것이 앞을 향해서 전진하는 뜻이다. 이는 유명하여 오래전부터 세상 사람들을 깨우쳐주는 경세통언(警世通言)이라 전해지고 있다. 간단히 말해서 뒤로 물러서는 것이 전진이라는 뜻이다.

 

장자(莊子)는 어떻게 이런 생각을 떠올리게 되었는가?

아주 평범한 사실에서 찾아냈다. 장자가 모내기를 하다가 문득 생각해냈다. 모내기 할 때에는 누구나 한 포기 한 포기 옮겨 심으면서 발 거름을 뒤로 물린다. 그러면서 이앙(移秧)이 잘 되었는가를 다시 살피면서 발길을 뛰어 놓는다. 그러는 가운데 모내기가 끝난 뒤엔 마음속으로 가을의 풍년을 기원한다. 장자는 그 과정에서 일의 보람을 느끼며 희망을 가꾼다는 미래를 열어가곤 했다. 다시 말하면 그는, 일은 성실히 해야 하고, 스스로 했던 일에 대해서는 반성을 철저히 하며, 노력의 결과는 모든 사람들에게 행복을 안겨준다는 것을 소중히 여겼다. 이는 인생교육에 있어서 성실에는 거짓이 없고, 반성은 겸허히 해야 하며, 미래를 위한 행복가치는 크든 작은 것이든 어떻게 창출하느냐가 중요함을 일깨워주고 있다.

 

따라서 때 없이 짖어대고 그 짖음 소리가 이웃의 밤잠을 방해하여 상인관계(相隣關係)를 악화시킨다면 그런 류의 개는 차라리 안 짖는 것만 같지 못하다. 그런 개는 양견(良犬)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사람의 경우에 있어서도 마음이나 가슴 속에서 우러나는 말이 아니고 입술에서 나불거리는 표풍낙엽(飄風落葉)처럼 다언롱설(多言弄舌)로 현혹을 일삼는 무리들은 어진 사람이라 일컬을 수 없다고 했다.

어떠한 사회에 있어서나 현인자(眩人者)는 뿌리 없는 말을 근거 있는 것처럼 내세워 사람의 마음을 혼몽케 하고, 선동인(煽動人)은 의혹을 믿게끔 하여 여론이 아닌 것을 여론인 것처럼 믿게 하여 정당한 공론(公論)이 제자리를 잡지 못하도록 방해하는 버릇을 버리지 못한다. 다시 말하면 현혹자는 사람들로 하여금 정상적인 판단을 어지럽히기 쉽고, 선동자는 사회적 정의를 혼미(昏迷)케 하기 쉽다. 따라서 그런 류의 사람들은 어진이가 아니고, 마구 짖어대는 개가 양견이 될 수 없는 것과 같다.

인류 역사의 기록물은 거의 예외 없이 옛 것으로부터 미래사를 지향해서 기록을 하게 된다. 옛 것은 시간적으로 앞에 놓여있고 미래의 것은 순서상 뒤에 있다. 역사기록을 이어서 기록해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앞에서부터 뒤로 물러서면서 기록을 하게 된다. 그리고 글씨를 쓸 때에도 앞에서부터 뒤로 물러서며 붓을 옮긴다. 또한 책을 읽을 때에도 거꾸로 책을 읽어가는 사람은 하나도 없다. 누구나 예외 없이 위로부터 아래로 향해서 책을 읽어가게 마련이다. 그 모든 것이 모내기 할 때 뒤로 물러가면서 이앙(移秧)하는 방법과 조금도 다틀 바가 없다.

이는 이미 언급했듯이 성실과 겸허와 보람으로 이어가는 이른바 진지함과 반성과 창조의 의미를 구슬 꿰듯이 일관성 있게 이어가야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와 같은 관점에서 보면 장자의 시구(詩句)는 시사(示唆)하는 바가 크다는 것을 새삼 느끼게 된다. 무슨 일을 함에 있어서도 성실성이 결여되고 겸허히 반성할 줄 모르고 오늘의 보람을 미래의 가치로 이어갈 수 있는 의지가 없다면 어떠한 일도 이루어질 수 없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김유혁 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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