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병장 유인석의 창의비 건립 추진 체계적인‘항일독립운동사’집필, 금석문과 현판의 대관사업

영월은 백두대간(白頭大幹)이 흘러 태백산과 소백산이 나누어지는 양백지간(兩百之間)에 위치하며, 정감록에도 十勝地로 되어있는 아름다운 고장이다. 취락지(聚落地)를 중심으로 동강과 서강이 영월읍을 감싸 안고 흐르며, 단종(端宗)의 유적과 김삿갓의 詩가 살아 숨 쉬고 있고, 자연경관이 아름다워 시인 묵객(墨客)들이 자주 드나들며 명승고적을 감상하고 유람하던 천혜의 명승지이다. 조선조 40여개 왕릉들은 동구릉을 비롯하여 서오릉, 선릉, 영릉, 홍릉 등 수많은 왕과 왕비의능들이 있지만, 왕릉은 한양에서 백리를 벗어나지 못하게 되어 있으나, 유독 단종대왕의 장릉만은 유일하게 백리를 벗어나 영월에 있다. 단종의 귀양은 많은 역사와 유물 유적을 남겼고, 적멸보궁인 법흥사를 비롯하여, 장릉 수호사찰인 보덕사 등 많은 사찰과 선사시대의 유적과 불교, 유교문화 등 문화적 가치가 높은 유산이 있다.

영월문화원(원장 엄흥용)은 이러한 선조들의 삶과 애환이 묻어있는 문화유산을 보존하고, 잠재력 있는 콘텐츠를 발굴하고자 노력하고 있다.

특히 엄흥용 원장은 영월지역과 연관된 역사적 사실 중, 아직 미흡한 부분을 발굴해 체계적으로 정립하고자 하고 있다. 이는 사학자로서 후손들에게 제대로 된 역사의식을 고취시키고자 하는 발로이다.

영월군의 문화유산과 관광지

영월군은 지리적으로 고립되어 고구려시대부터 독립된 현으로서 지역문화를 이루었다. 현재 군내에는 국가지정문화재로 보물 1점을 비롯하여 사적 3점, 천연기념물 4점이 있다. 또한 도지정문화재로는 유형문화재 10점, 기념물 6점이 있으며, 문화재자료 11점이 있다.

불교문화재로는 수주면 법흥사 경내에 영월흥녕사징효대사탑비(寧越興寧寺澄曉大師塔碑, 보물 제612호)·징효대사부도(강원도 유형문화재 제72호)·흥녕선원지(강원도 기념물 제6호)·법흥사석분(法興寺石墳, 강원도 유형문화재 제109호) 등과 영월읍 보덕사에 보덕사극락보전(강원도 문화재자료 제23호), 보덕사염불당과 사성전, 금몽암(강원도 문화재자료 제25호) 등이 있다. 유교문화재로는 영월향교(강원도 유형문화재 제100호)창절서원(강원도유형문화재 제27호)를 비롯해 자규루 및 관풍헌(子規樓觀風軒, 강원도 유형문화재 제26호), 영모전(永慕殿, 강원도 유형문화재 제56호), 창절사(彰節祠, 강원도 유형문화재 제27호), 민충사(愍忠祠, 강원도 문화재자료 제27호) 등이 있으며, 금강정(강원도 문화재자료 제24호)·요선정(강원도 문화재자료 제41호) 등의 정자가 있다. 그리고 왕성으로 불리는 영월왕검성(寧越王儉城, 강원도 문화재자료 제52호)과 단종의 애사가 어린 장릉(사적 제196호)·청령포(강원도 기념물 제5호)를 비롯해 수많은 비석과 정려각·열녀문·효자문 등이 있다.

천연기념물로는 하동면 진별리의 영월고씨굴(천연기념물 제219호), 영월읍 하송리의 수령 약 1200년 된 영월의 은행나무(천연기념물 제76호), 청령포 관음송(천연기념물 제349호) 등이 있다. 풍부한 문화유산과 수려한 자연경관, 신비스러운 석회동굴 등을 자랑하는 영월은 강원도 유수의 관광지로 알려져 있다. 주요관광자원은 단종의 애사가 담긴 장릉·청령포·낙화암 등을 비롯해 영월왕검성·법흥사 등의 문화재와 태백산·백운산·영월8경·어라연 계곡 등이다. 영월고씨굴 외에도 용담굴(강원도 기념물 제23호)·연하동굴(강원도 기념물 제31호)·대야동굴(강원도 기념물 제32호) 등이 있다.

의병장 유인석의 창의비 건립 추진

“영월은 최초의 을미의병인 ‘호좌의병진의 창의지’이다. 제천이나 춘천 같은 경우에는 의암 유인석에 대한 기념사업이 활성화되었지만 영월은 아직 미비한 상태이다. 지자체와 연계해 ‘영월호좌의병진창의비’ 건립을 추진하고 있다.”라는 영월문화원 엄흥용 원장. 엄흥용 원장은 올해 8월 취임하자마자 유인석 장군의 창의비석 사업을 추진하였다. 평생 향토사를 연구하였던 그가 평소 안타깝게 생각 한 부분은 유인석 장군은 영월과 밀접한 관련이 있음에도 제대로 된 기록이나 기념비가 없었다는 것이었다.

1895년 12월 24일(음력)영월 객사의 동헌인 관풍헌(觀風軒) 앞에 있는 백운루(白雲樓)에 ‘복수보형(復讎保形)’이란 큰 깃발을 내걸고 호좌의진(湖左蟻陣)의 의병대장으로 추대되었다. 창의 명분은 국모인 명성황후 시해의 원수를 갚고 단발하지 않은 채 신체를 보존한다는 ‘복수보형(復讐保形)’이었다. 아울러 전국에 격문(檄告八道列邑)을 발송해 의병봉기의 취지와 동참을 촉구했다. 유인석 의병진은 한때 3,000명을 넘으며 제천·충주·단양·원주 등지를 중심으로 중부지역 일대를 석권했다.

이러한 의병들의 반일항전은 민중들의 반침략의식을 크게 고무시키며 1905년 이후 항일의병운동으로 계승됐다. 의병봉기에 가담한 유생들 또한 다양한 방식으로 항일구국운동에 참여했다. 엄흥용 원장은 이와 같은 역사적 사실에 근거해 영월군의 지원을 받아, 영월호좌의진창의비’ 건립을 추진하여 내년 3·1절 기념식 때 관풍헌 앞 도로변에 세울 예정이다.

영월지역의 항일운동의 역사적 사실 집필

엄흥용 원장의 또 다른 과제는 일제 치하에서 일어났던 영월지방의 항일운동의 실체를 알리고자 ‘영월지방의 항일독립운동사’를 집필하고 있다.

3·1운동 당시 주천면 금마리에서 일어난 만세운동으로 1919년 당시에는 주천면이 아니고 양변면 금마리로서, 양변면장을 지낸     운동을  

오전 11시가 되자 횟돌백이에서 망을 보던 박수항(朴受恒), 홍봉관(洪鳳官)이 당나귀를 탄군수일행이 금마리를 향하여 오고 있다는 사실을 마을에 알려왔다.

금마리(金馬里)에 도착한 석명선(石明善) 군수는 주막거리에서 주점(酒店)을 하는 박영훈의 집에서 이 지역 주민들의 실질적인 지도자인 박수창에게 ‘만세반대서명부’에 서명할 것을 강요하였다.

그러나 박수창은 이를 거절하였고, 군수일행에게 태극기를 들리고 주민200여명과 함께 독립 만세를 부른 사건이다.

또한 지금도 관광지로서 많은 사람들이 찾고있는 고씨동굴은 임진왜란 때 의병장 고씨 형제가 동굴에 숨어 있다가 나온 연유로 고씨동굴이라는 명칭을 가지게 되었다. 임진왜란 때 고종원, 고종길, 고종경 삼형제가 있었다. 당시 영월군수는 도망을 가 평창군수 권두문이 영월군수를 겸하는 상황이었는데, 그가 사태가 급박하게 되어 강원감찰사 유영길은 의병대장 고종경에게 병사 600명을 줘 원주 흥원진으로 인솔하라는 명을 내렸다고 한다.

유영길은 고종경에게 병사 600명을 줘 원주 흥원진으로 인솔하라는 명을 내렸다고 한다. 그러나 도중에 병사들이 죽거나 탈영하는 등 하여 제대로 임무를 수행할 수 없었다. 이에 고초를 겪었고 제때 돌아오지 못했다. 이에 군법으로 고종경을 처형 하였다. 한편 남은 두 형제는 고씨동굴에 숨었는데 누군가 밀고해 왜군들이 섶에다 불을 지르고 고종원 부인은 동굴에서 자결했다는 내력이 있다.

고씨 동굴 이야기는 고종원이 남긴 난중일기가 있어 집필에 참고하고 있다.

엄흥용 원장은 이와 같은 역사적 사실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하여 후세에 제대로 알리고, 선열들의 숭고한 애국정신을 함양코자 매진하고 있다. 고씨 동굴 이야기는 고종원이 남긴 난중일기인 ‘기천록’이 있어 집필에 참고하고 있다. 내년 3월 완간을 목표로 집필하고 있는 중이다.

금석문과 현판의 대관사업 박차 가해

영월은 단종과 관련된 사육신 생육신의 발자취도 많다. 단종릉인 장릉은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됐고 관련 유적이 많은데 금강정, 민충사, 낙화암 등이 있다.

엄흥용 원장은 만약 이들 단종사적지의 현판이나 금몽암, 보덕사, 요선정 등의 현판들이 화재 시 소실될 우려가 있어 영월 지역 금석문과 현판들을 탁본을 떠서 문화재대관을 총정리하는 작업도 준비중이다. 비석에 새겨진 금석문을 탁본해 사진과 함께 내용을 보관하면 변형되거나 유실되어도 그 기록이 남아 복원이 쉽기 때문에 시행하고 있는 사업이다. 이에 대해 엄 원장은 “시급한 것이 금석문 대관이지만 해야 할 현판도 너무 많다. 그중에는 숙종, 영조의 어필현판도 있다.

반드시 탁본을 떠서 보관할 필요가 있다. 영월에 금석문은 50개가 넘고 현판도 30개 이상 있다.”라며 영월 금강정에 송시열 의 ‘금강정기’ 란 현판 글도 없어졌지만 ‘영월제영’에 탁본이 있어 언제라도 복원할 수 있다고 한다. 역사적 가치가 있는 단종대왕 능 비석은 이미 탁본작업을 했다고 한다. 도로포장과 같은 사회 기반시설은 후손들도 얼마든지 만들 수 있지만 문화유산은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가 지키고 보전해야 한다고 강조하는 엄 원장은 “후손들을 위해 해야 할 도리이며 누군가는 해야 할 일이기에 스스로 나섰다. 임기동안 소명의식을 갖고 역사를 보존하고 발굴해 나갈 계획이다.”라고 밝혔다.

관광도시로 변모해 나가면서 겪는 내홍에 대해

엄흥용 원장은 “영월이 탄광도시에서 관광도시로 변화하고 있는데 이런 변화에 대비한 대안이 미흡한 감이 있다”면서 인구도 많이 줄었고 산업 기반시설이 없다시피 하여 지역 발전이 안 되고 있다고 한다.

먹고 사는 문제가 어느 정도 안정이 되어야 문화를 향유하고자 하는 욕구가 있는데 그런 면에서 영월은 부족한 점이 많다는 것이다. 따라서 문화원장으로서 책임감을 더욱 느낀다는 그는 지역 발전을 위한 지자체의 관심과 지역주민이 창의적인 사고가 우선시 되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천혜의 자연환경을 이용한 각종 스포츠, 레저사업과, 역사적 문화유적을 현대적 감각으로 가치를 높여 스쳐가는 관광객이 아닌 쉬어가는 관광객이 될 수 있는 인프라 조성이 시급하다는 것이다. 현재 영월은 관광객이 즐길 수 있는 여가시설이 전무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먹거리와 즐길거리 문화에 맞는 숙박 시설, 위락시설, 놀이공원 등이 턱없이 부족하다.

그나마 폐광대체 사업으로 조성된 영월의 ‘동강시스타’는 군민들의 희망이었는데, 건립당시 시작부터 450억 정도의 부체를 떠 앉고 시작한 사업이라 지금은 부도직전의 상태다. 탄광대체사업의 대안으로 만들어진 ‘동강시스타’가 안정된 경영상태가 유지되어 영월군민들이 밝게 웃을 수 있는 날이 올 것을 기대한다.

교육자로서 평생을 함께 한 향토사랑

영월문화원은 영월 문화에 관심 가진 사람이면 누구나 참여할 수 있다. 단종이나 김삿갓 등 유적지가 많아 이런 방면에 흥미를 가진 사람들이 많다. 회원은 약 350여명이다. 회원들의 문화 예술을 향유하기 위해 운용되고 있는 문화학교에는 가요반, 서예반, 한국화반, 서양화반, 한시반 등 11개반이 있다.

제 8대 회장으로 취임한 엄흥용 원장은 회원으로 가입한지 35년이 되었고, 이사로서 25년을 봉사했다. 그는 영월 토박이로 1955년 방절리에서 나고 지금까지 고향을 떠난 적이 없다. 1978년 강릉 카톨릭관동대학교 역사학과를 졸업하고, 다음해에 영월 석정여고에 역사교사로 부임한다. 그리고 2015년 교장으로 정년퇴임까지 37년이다. 오직 한 군데에서 몸을 담았다.

교육자로서 올곧은 마음으로 후세양성에 진력을 다했던 그는 수신제가(修身齊家)를 몸소 실천하였다.

보고 배우는 학생들에게 가장 큰 본보기의 교육이었기 때문이다. 이제 고향을 위한 더 큰 족적을 남기고자 하고 있다. 그동안 고향사랑에 의한 역사와 관련된 영월 향토사 등을 연구해 책을 7권정도 썼다.

대표저서는 ‘영월 땅이름의 뿌리를 찾아서’이며 이 외에도 단종의 역사를 체계화한 ‘장릉에 향을 사르며’와 ‘세계문화 유산 장릉’, ‘국역 부읍지·군읍지’, 와 ‘절의가 피어난 방절리’, ‘김삿갓 한시’ 등의 있다.

부인 박금용여사(62세)와의 사이에 1남1녀를 두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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