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의‘메이요 클리닉(Mayo Clinic)’이 탄생하다

이샘병원 이성근 원장

매년마다 존스 홉킨스 병원과 함께 ‘US News and World Report’지의 최고병원 선정 경쟁에서 1, 2위를 다투는 세계적인 병원이 있다.

미국 미네소타 주에 위치한 인구 10만 명이 채 안 되는 자그마한 도시 로체스타에 있는 메이요 클리닉(Mayo Clinic)이 바로 그 병원이다. 이 병원에는 세계 각국의 왕족과 대통령 그리고 세계적인 스타들이 찾는 병원으로 알려져 있는데 바버라 부시 여사와 아놀드 파머, 빌리 그레이엄과 조지해리슨 등이 메이요 클리닉(Mayo Clinic)을 이용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허허 벌판의 시골마을에 국제공항이 있는 것도 자가용 비행기를 타고 오는 이들의 입국 수속을 위해서라고 한다. 병원을 찾아오는 외국인 환자의 수는 연간 1만 명에 육박을 한다고 하니 그 규모와 의료 시설을 상상해 볼만한데 ‘철저하게 환자 중심의 병원’으로 운영된다는 것이 메이요 클리닉(Mayo Clinic)의 가장 큰 특색이다. 인간이 태어나서 부터 죽을 때까지 인생의 삼분의 일은 병원의 신세를 질 수 밖에 없다. 누구도 생로병사(生老病死)의 범주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고 병원의 입원이 어쩔 수 없는 선택의 범주라면 보다 나은 환경의 병원 그리고 환자의 모든 것을 맡길 수 있는 병원을 선택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이치일 것이다.

그래서 인간은 아팠을 때 단순히 치료의 목적뿐만 아니라 정신적으로 힐링(Healing)의 공간을 찾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아픈 환자들이 가장 진료를 받고 싶은 병원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병원이 될 수밖에 없는데 그러한 간절한 환자의 소망으로 ‘메이요 클리닉(Mayo Clinic)’이 탄생하게 되었으며 지극히 당연한 결과이다. 그렇다면 현재 대한민국 병원의 현주소는 어떠한가? 결론부터 말하면 미흡하기 짝이 없다. 시설이나 공간은 그렇다고 치더라도 일부 병원의 횡포와 의사들의 권위적이며 고압적인 태도는 심판자(?)의 역할처럼 무섭기까지 하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는 것도 사실이며 환자의 정당한 권리마저 외면당하고 있는 것 또한 현실이다.

그런데 일부 병원들의 전횡에 반기를 들고 보란 듯이 ‘예술의 전당’을 방불케 하는 치유(Healing)의 공간으로 병원 전체를 꾸미고 환자들에게 마치 오랜 친구처럼 다정하게 다가와서 진료에 도움이 되는 조언을 아끼지 않는 그야말로 철저하게 ‘환자 중심의 병원’이 국제 해양도시 부산에 설립되었다고 하여 본지에서 확인차 병원을 직접 방문해 보았다.

대한민국의 ‘메이요

클리닉(Mayo Clinic)’이 탄생하다.

‘이샘 병원’의 이성근 원장이 바로 주인공인데 병원 건물에 첫발을 내딛는 순간 반갑게 맞이하는 것은 현대 감각으로 단장된 내부와 함께 아트 페어(Art Fair)를 방불케 할 만큼 여러 점의 조형물과 멋진 명화가 시선을 끌어냈다. 환자를 진료하고 있는 이성근 원장은 특유의 미소와 함께 다정한 모습으로 환자를 진료하고 있어 기다리는 동안에 박람회를 온 기분으로 병원의 이고 저곳을 관람할 수 있는 시간을 가졌다.

복도에는 국내외 유명 화가들의 작품이 아름답게 수를 놓고 있었고 다른 병원에서 쉽게 볼 수 없는 체력 단련시설을 포함해서 입원실 또한 환자를 최대한 배려한 공간이라는 생각이 저절로 들었다. 한참 동안 전람회(?) 구경을 하고 난 후에 병원의 진료가 마감되고서야 이성근 원장과 인터뷰를 할 수 있었는데 대하드라마를 보는듯한 파란만장한 인생 스토리를 들을 수 있었다.

 

전투군의관으로

병사들과 함께한 군 복무 시절

이성근 원장은 부산대학교 의과대학을 졸업하고 인제대학교병원에서 내과 수련의 시절을 보냈다. 인턴시절을 89년도에 보내고 90년도에 레지던트 생활을 했으며 94년도에 내과 전문의 자격을 취득한 후에 의과대학을 졸업하고 94년부터 97년까지 군의관으로 충청북도 증평의 37사단과 창원에 위치한 39사단에서 군의관으로 군복무를 했고 전역당시의 계급은 대위였다고 한다. 남자라면 군 생활 이야기를 빼놓을 수 없어 군 복무시절 스케치를 부탁하자 이 원장은 “군복무를 할 때 별명이 ‘전투 군의관’이었습니다. 단 하루도 게을리 하지 않고 군 생활 동안 맡은바 임무를 철저하게 수행한다고 해서 붙여진 별명인 것 같습니다.

군의관의 사명은 병사들을 질병으로 부터 보호하고 예방하며 아프면 따뜻하게 보살펴주는 것이라고 생각을 했고 신병들이 소외감으로 인한 자살 예방을 하게 해주는 것 또한 중요하다고 생각을 했습니다. 군의관 복무시절에 정말 열정적이었습니다. 밤이면 계란 두 판을 들통에 삶아서 더블 백에 담아 초소를 돌아다니면서 병사들 손에 계란을 쥐어주고 격려를 했던 일이 가장 기억에 남습니다. 그리고 사병들이 군 생활을 하면서 의무대를 방문하기가 쉽지 않기 때문에 당직을 설 때마다 위병소에 통보를 하고 예하부대 내무반에 돌아다니면서 병사들의 신체검사를 통해서 선임 병사들의 구타 여부를 확인하고 신상체크를 하면서 혹시 고충 사병은 없는 가(?)를 살펴보면서 병사들과 함께 동고동락 했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합니다.”

그야말로 ‘전투군의관’으로 철저하게 군복무를 한 셈이다. 전역을 하고 아주대학교 병원에서 1년간 ‘내부 괴사내과’에서 전임 의사로 근무를 하며 의료 술의 내공을 업그레이드를 했다. 그리고 부산에 내려와서 동의 의료원에서 ‘내분비 내과’ 과장으로 2002년까지 근무를 했다. 곧바로 미국으로 건너가 미국 캘리포니아 주에 있는 ‘로마린다(Loma Linda)대학’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한 후에 ‘꼬닥’이라는 후순위 과정으로 2년 동안을 보내면서 ‘내분비 대사’에 대해서 임상실험을 공부했다. 그곳에서 갑상선을 연구하는 좋은 선생님을 만나서 공부를 하면서 국내에서 품었던 의문을 많이 풀어내는 계기를 맞이한다.

그리고 돌아와서 동의 의료원에서 1년간 근무를 하고 2005년도에 ‘범내골’의 지하철역 앞 은행건물에 개업을 했다. 처음에는 한 층만을 사용하다가 불어나는 환자들로 인해 층수를 늘리게 되었다.

그리고 11년간 지역사회를 위해서 ‘내분비 질환’과 ‘소화기 질환’ 전문 의원으로 진료를 했다. 2011년부터 의원에서 최초로 암수술을 하게 되었다고 한다. 내과의원이라는 이름으로 수술을 하는 것이 쉽지 않았을텐데 수술 건수로는 2012년도에 최고 건수를 달성했다.

이성근 병원장의 말에 따르면 “병원의 규모로 볼 때 의원, 병원, 종합병원, 상급 종합병원이 있는데 암수술을 300여건을 시술해서 의원과 병원만을 놓고 볼 때 전국에서 일등을 했습니다. 의원으로는 한계가 있어서 지금 건물을 짓게 되었고 저에게는 꿈이 있습니다.

대한민국의 메이요 클리닉(Mayo Clinic)을 만들기 위한 것이 그 꿈이고 절대 포기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병원을 신축하게 된 것입니다.” 이 원장은 꿈을 현실로 받아들이기 위해 한걸음 한걸음씩 최선을 다해 나아가고 있었던 것이다.

 

의술(醫術)로 사람을 살리고 인술(仁術)로 회사를 살려내다.

이성근 원장에게는 남다른 이력이 하나 더 존재하고 있는데 ‘경은산업 주식회사’라고 하는 직원이 85명이나 되는 중견 제조업의 명실상부한 대표를 맡아 경영에 참여를 하고 있다는 것이다. 공장의 시설 규모가 4400평이나 되며 원단과 화학섬유를 제조하고 폴리에스터와 레저를 만드는 회사이다.

자동차의 ‘썬루프“에 주로 쓰이는 원단으로 현대자동차에 납품을 하는 벤더 업체이기도 하다. 신발의 주재료를 나이키와 아디다스 그리고 리복에 대량 수출도 한다. 500만 불 수출 탑을 받은 탄탄한 중견 기업으로 2007년에 사업을 시작해서 벌써 10년이 되어간다고 한다. 어떻게 병원 의사가 회사를 경영하게 되었을까? 그때 상황 설명을 자세히 들어보면 ”가까운 지인이 어렵다고 해서 돈을 빌려주었는데 부도를 내고 사라진 바람에 어쩔 수 없이 회사를 인수해서 경영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울며 겨자 먹기로 인수한 회사가 내부적으로 살펴보니 인적 구성원들 중에 간부급 사원들에게 심각한 문제가 있었습니다.

벌건 대낮에 11톤 트럭으로 원단을 실어서 다른 업체에 팔아먹고 있었던 것입니다. 회사 직원들끼리 짜고 벌인 행동이었습니다. 젊고 정직한 직원들이 보다 못해 제보를 해서 알게 되었습니다. 2007년 2월 5일 단 하루 만에 회사를 장악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여기서부터 심각하게 진행이 됩니다. 대부분의 직원들이 영업부 직원이었기 때문에 영업을 할 사람이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실제 장부를 뒤져보니 돈이 남지 않은 일감만 받아와서 일을 하고 있다는 것을 보고 전문 경영인을 데리고 들어가서 진단을 해본 결과 3개월 안에 문을 닫아야 된다고 합니다. 하지만 46억의 어음과 60억의 현금 채무로 모두 합하여 100억이 넘는 돈이 채무로 고스란히 남아 있는 상황이라 문을 닫을 수가 없었습니다. 경영악화로 더 이상 현금을 지급하지 않으면 원자재를 대주지 않기 때문에 작업을 할 수가 없어서 하루는 날을 잡아서 관련업체를 모두 불러놓고 회사의 사정을 사실대로 이야기하고 인간적으로 호소를 하며 회사를 살려내겠다고 도와달라고 간청을 했습니다. 관련업체들은 저의 신분과 진정성을 믿고 원자재 공급을 해주기 시작했습니다.

일단 고비는 넘긴 듯 했지만 잠시 숨을 돌리기도 전에 끝없는 부도설과 채산성 악화로 고통의 나날을 보내야 했습니다. 건전한 기업이 자기 자본 비중의 채무가 200%라고 하는데 3600%가 채무였으니 하소연할 곳도 없을 만큼 답답했습니다. 그래도 그해 5월쯤에 회사를 살려야 한다는 각오가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새벽에 회사에 들어가서 직원들을 데리고 공부를 했습니다.

잘할 수 있는 것이 공부밖에 없었으니 그 길을 택한 것입니다. 회사원들이 옛날 방식으로 피동적으로 움직이던 행동을 탈피해서 조금씩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열정을 보여주는 대표를 보고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한 것입니다. 하지만 부도설은 여전히 돌고 동요된 직원들은 하나 둘 빠져나갔습니다.

그러나 절대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그해 10월 말 정도에 국가에서 주는 자금을 받아서 기계 두 대를 빌렸습니다.

총 4대의 기계를 가지고 운영을 한 셈입니다. 방만하게 운영되던 것을 전부 줄이고 기계 자체도 임대를 해서 운영하기 시작을 했습니다. 일 년에 나가던 이자만 9억이었고 10억 정도가 적자로 누적되는데 내용을 파악해보니 전부 이자였던 것입니다.

이자를 절감하는 방법을 찾았습니다. 3년 뒤에는 임대비용과 이자를 같은 수준으로 만들어냈습니다. 그리고 다시 기계 두 대를 6억에 임대를 했더니 부도설이 싹 들어가더군요. 그 이유를 상세히 들어보니 대표가 의사라 어느 정도 안정이 되면 모든 것을 정리하고 본업으로 돌아갈 것이라는 추측을 한 것입니다. 아무튼 그렇게 2년 동안 새벽에 회사에 들어가서 경영학 공부를 하고 산업 전선에 뛰어들었으며 집에 돌아오는 시간이 밤 11시 정도였습니다.

2년 동안을 죽어라고 매달렸더니 적자투성이의 회사가 점차 정상으로 돌아가게 되었고 이듬해부터 흑자경영으로 돌아섰고 2010년부터 완전한 흑자로 전환되어 지금까지 7년 동안 흑자경영을 하고 있습니다.” 그야말로 감동의 인간 승리를 거둔 셈이다. ‘의술로 사람을 살려내고 인술로 기업을 살려낸 것이다.’ 지금도 이성근 원장은 회사에서 받은 영감이나 좋은 경영기법들이 있으면 병원 업무에도 그대로 적용을 한다고 한다. 회사 최고의 강점은 복지가 잘되어 있다는 것으로 ‘복지 우수기업’으로 여성부 장관상을 수상했고 수출을 통해 산업통산부 장관상도 받았으며 부산시에서 지정하는 ‘자랑스러운 중소기업인’ 상도 수상을 했다. 그간의 수고를 인정받아서 우대 기업인 카드도 발급 받게 되었고 가족이나 지인들과 함께 외국을 나갈 때 참 유용하게 활용을 하고 있어 부러움을 한 몸에 사기도 한다고 하면서 그간의 고생이 상기되는 듯 미소를 짓는다.

이성근 원장은 학창시절에 미식축구를 즐겨했다. 등 번호는 66번으로 상대방 ‘쿼터백’을 잡는 포지션이었다. 정말 그 시절에는 비명을 지를 만큼 즐거웠다고 회상을 한다. 내과 질환을 주요 진료과목으로 택하게 된 배경을 묻자 “정말 재미있습니다. 오늘은 또 무슨 병을 발견할까? 환자가 모르는 병을 찾아주고 치료를 해주면 뿌듯합니다. 일상의 반복이지만 5%는 검사를 통해 병을 찾아내고 진료를 하면 한편으로 무한한 보람을 느낍니다. 그리고 아침이면 오늘은 가서 어떤 병을 찾아낼까? 하는 설레는 마음도 있습니다.” 그가 타고난 의사라는 생각이 들게 하는 부분이다.

승부사의 기질로 한국의 메이요 클리닉(Mayo Clinic)을 완성하련다.
이성근 원장은 무엇이든 하면 끝을 보는 승부사의 기질을 가지고 있다.

취미로 하는 골프 하나만 보더라도 일상적이며 반복적으로 치는 것이 아니라 과학적으로 연구를 하고 분석을 하면서 모르는 것은 정말 잘하는 프로에게 직접 배우고 한 타 한 타 정성을 다해서 친다. 지금은 거의 싱글수준이지만 72타 안에 완벽하게 들어가는 것으로 목표를 세우고 꾸준하게 연습을 하고 있다고 한다. 이 원장은 팁으로 ‘무엇을 하던 좋은 선생님을 만나는 것이 중요하고 그 바탕 위에 열심히 공부하고 노력하는 것’이라고 말을 한다. 94년도부터 골프를 치기 시작해서 미국에서 정말 잘 다듬어 가지고 왔는데 부산에서 개업을 하면서 스트레스로 엉망이 되어 버렸다고 너스레 섞인 농담을 했다.

“10년 안에 72타를 쳐보고 죽자 라는 생각을 갖고 열심히 하고 있습니다.

버킷리스트를 세워놓고 할 정도입니다.”라고 말하는 이성근 원장은 하고자 하는 목표를 정하면 중단이 없는 전진을 하는 삶의 태도를 취미생활에서도 그대로 엿볼 수가 있었다. 슬하에 자녀는 일남 일녀를 두고 있다. 영화감독을 꿈꾸는 아들을 자랑스러워한다. 가장 힘들었을 때는 회사경영이 어려웠을 때 6개월 정도였다고 한다. 파노라마 같은 삶이다. 예술품을 병원의 벽에 걸어놓고 즐거워한다. 그 이유를 물어봤더니 ‘병원이란 진료만하는 공간이 아니라 환자들이 아픔을 잊게 하고 치료를 받는 동안이라도 즐거움을 주기 위한 이색 힐링 공간’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라고 겸손하게 말을 한다.

어려서 그림을 곧 잘 그렸다. 학교에서 주는 포스터 상을 포함해서 수차례 상을 받을 만큼 그림에도 소질이 있어 삶 자체가 예술인 이성근 원장은 예술품을 바라보는 시각도 남다르다. 이 원장의 인생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만남을 물어 보았다. 지금 아내와의 만남이 가장 소중하다고 한다. 다음으로 인생의 터닝 포인트를 주었던 만남은 수원에 위치한 아주대학교 병원에 근무했던 임현만 선생님이라는 ‘인생의 참스승’을 만난 것이라고 한다. 인격적인 면에서나 환자를 대하는 태도와 내분비 지식에 대한 모든 것을 그 분을 통해서 업그레이드를 할 수 있었고 지금 의사 생활을 하는데 큰 자양분이 되었다고 한다.

이성근 원장의 말에 따르면 “학교는 의사를 만들어주었고 인제 대학의 부산 백병원은 내과 전문의를 만들어주었으며 아주대학 병원은 내과 중에서도 내분비 전문 의사를 만들어 주었습니다. 저를 가장 화려하게 만들어준 곳이 아주대학 병원입니다. 임현만 선생님이 생존해 계셨으면 아마 병원 개업을 안했을 수도 있습니다. 골프도 같이 치고 1년에 두 번 정도 씩 불러 올려서 같이 술도 마시고 아낌없는 사랑을 베풀어 주신 분으로 영원히 기억될 것입니다.

지금은 고인이 되셔서 굉장히 안타깝습니다.” 인간적인 면모를 들여다보게 하는 대목이다. 임현만 선생님 밑에 정윤석 교수가 있는데 그분이 미국 켈리포니아 주의 ‘로마린다(Loma Linda)’ 대학으로 먼저 들어간다.

그리고 뒤 따라 들어가 공부를 하게 되고 정윤석 교수가 먼저 한국으로 돌아가고 난 후 2년간을 후임으로 근무를 하게 되었다. 그때 ‘메이요 클리닉’을 가볼 수 있는 우연한 계기가 있었다. 궁극에 갈 수 있는 정점까지를 보게 된 것이다.

150년 된 역사를 가진 세계에서 일등짜리 병원을 보면서 ‘한국의 메이요 클리닉’을 만들겠다는 야망을 일찍부터 불태운 것이다.

현재 공익재단으로 남아있는 ‘메이요 클리닉’을 자세히 관찰을 하면서 어떻게 환자를 의사가 진료실에서 상대를 하는가? 하고 유심히 관찰하고 스케치하여 지금 ‘이샘 병원’의 진료실 내부 모양을 ‘메이요 클리닉’을 그대로 본떠서 만들게 된 것이다. 옆에 환자를 나란히 놓고 진료를 하며 수평적 관계로 대화를 하는 모습은 지금도 그대로 가슴에 새기게 되어 깊은 울림으로 다가 온다고 한다.

‘이샘 병원’의 궁극적인 목표는 처음 시작할 때 산술적으로만 보면 동네에서 일등을 하고 부산진구에서 일등을 했다. 그리고 부산에서 일등 병원으로 거듭나고 그 후에 대한민국에서 일등을 하는 것이고 최종목표는 외국인들이 항공기를 타고 김해 공항 활주로에 내려 ‘이샘 병원’을 찾아서 진료를 받으러 오게 만드는 것이다.

병원의 모든 시스템은 미국의 ‘메이요 클리닉’을 롤 모델로 삼고 있으며 목표를 향해 부단히 노력하고 있다. 현재 부산에서 세 번째 규모지만 조금만 있으면 부산에서 일등을 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을 한다.

이 원장은 “메이요 클리닉에 가면 병원 전체가 예술적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환자들에게 편안한 힐링을 안겨주고 정말 병원이라는 생각이 전혀 들지 않습니다.

그래서 저희 병원도 첫 번째 소독약 냄새를 먼저 없애기로 했습니다. 소독약 냄새가 나지 않으려면 그만큼 청소를 자주 해야 합니다. 그래야 전염이 되지 않고 청결한 상태를 유지할 수 있습니다. 병원은 그 자체가 세균 덩어리인데 소독약 냄새가 나지 않게 하려면 계속 쓸고 닦아야 합니다.

예를 들면 청소를 하지 않는 횟집의 수족관에 약을 7가지를 넣는다고 합니다. 손님들이 약을 먹은 것인지 회를 먹은 것인지 모를 정도입니다. 그러나 진짜 청소를 자주하는 수족관을 가지고 있는 횟집은 그만큼 청소도 자주 한다고 보면 됩니다.

부지런히 움직이지 않으면 소독을 위해서 몸에 해로운 약을 필요로 한다고 보면 틀림없습니다.” 이성근 원장은 병원의 로비에 그랜드 피아노를 설치할 계획을 가지고 있다. “메이오클리닉의 스토리에도 그랜드 피아노가 자주 등장합니다.

스타급 연주자들이 병원을 방문하여 즉흥으로 연주를 합니다. 그리고 유명한 가수가 환자나 보호자로 왔다가 즉석에서 연주하고 공연하는 일이 자주 있습니다.

저희 ‘이샘 병원’도 그런 공간으로 만들려고 합니다.” 병원의 내부는 초현대식으로 설계되었고 공간마다 그야말로 예술을 담고 있는 ‘아트페어와 박람회장’ 같은 느낌이 들었다. 안락한 분위기의 병실은 하늘과 맞닿아 있고 단순하게 환자만을 많이 받겠다는 생각 보다는 답답한 환자의 마음을 헤아렸다. 전염병을 예방하기 위해서 철저하게 통풍과 미관을 고려해서 설계되어 완성한 미적 공간이다.

이 원장은 “대한민국을 강타한 ‘메르스(MERS)’도 환기의 문제였습니다. 공기로 전염되는 병이었기 때문에 심각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병원은 철저하게 전염병의 차단과 환기를 위해 건물 중앙부인 중정을 뚫었습니다.

병실도 하늘과 맞닿아 있습니다. 비가 오는 것을 환자들이 직접 볼 수 있고 나무를 보면서 치유능력을 불러일으키고 환기와 통풍이 되게 과학적인 설계를 고려해서 병실을 만들었습니다.” 정말 중간 부위에 심어진 나무는 자연과 함께하는 느낌을 받았으며 철저하게 ‘환자 중심의 병원’을 만들기 위해 고민한 흔적이 역력하게 느껴졌다.

정보화시대에 맞는 올바른 의료인 상의 정립

직원들과 후배 의사들에게 하고 싶은 말을 물었더니 “시간 날 때마다 직원 여러분의 급여는 환자의 주머니에서 나온다는 것을 교육을 통해서 계속 전달을 합니다. 그리고 후배의사들에게는 환자들에게 절대 ‘갑질’을 해서는 안 된다고 말을 하고 싶습니다. 곰곰이 따져보면 병원은 진료비를 받는 ‘을’인데 ‘갑질’을 합니다. 묘한 권력을 행사하는 것이지요. 병원의 의사가 환자의 질병이라는 약점을 잡아서 무한 권력을 행사하는 것입니다. 병에 대해서 치료할 수 있다는 것과 조금 더 질병에 대한 지식을 안다는 힘의 우위를 가지고 ‘갑질’을 하는 것은 정말 잘못된 일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진료비를 받은 만큼 양질의 의료 서비스를 해야 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지금까지 보았던 보통 의사들에게서 볼 수 없었던 훌륭한 인품과 겸양의 미덕을 소유하고 있었다. 계속해서 말을 이어갔다. “지금은 시골의 할아버지가 혈청 지오티(GOT)와 혈청 지피티(GPT)라는 용어를 쓰면서 병원을 찾아옵니다. 예전에 동료의사들끼리 쓰는 용어인데 환자가 미리 알고 들어옵니다.

저는 그러한 현상을 고유명사가 보통명사가 되었다고 표현을 합니다. 정보가 가치로서 가져야 할 소중한 격이 떨어졌다고 생각을 합니다.

지식이 수평화 되어가고 있는 것을 느끼며 보통의 상식만을 가지고 진료를 하는 일반 동네 의원은 어려울 수밖에 없다고 봅니다. 전문화되고 특화되지 않고는 병원도 살아남기 힘든 세상이 온 것입니다. 예를 들면 백혈병 환자의 보호자가 가진 치료에 관계된 최근 의료지식이 의사보다 훨씬 정확하고 더욱 더 많은 지식을 가지고 있으며 그러한 사실을 인지하고 담당 의사는 환자를 대해야 합니다. 그러니 마구잡이로 환자를 대하는 병원이 잘 될 수가 없습니다. 옛날에는 책을 사서 밤새 공부해야 조그만 정보를 얻을 수 있었지만 지금은 인터넷을 통해서 모든 지식을 한눈에 파악할 수 있습니다.

영어를 아는 사람은 인터넷을 통해서 해석까지 해서 병에 대한 지식을 쌓아 가지고 병원에 진료를 받기위해 옵니다. 정보의 가치를 의사가 독점하는 시대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의사는 더욱 더 공부를 해야 하고 환자를 친절하게 맞이하는 서비스 정신을 가지고 대해야 살아남을 수 있는 무한 경쟁의 시대가 도래 한 것입니다. 그리고 의사와 환자의 유대감의 형성이 어느 때 보다 중요한 시대입니다. 의사도 사람이라 실수할 수 있는데 서로 간의 유대감이 형성되어 있을 때는 문제 해결이 가능하지만 그렇지 않을 경우는 법으로 가고 병원의 명예가 실추되는 경우를 종종 보게 됩니다. 그만큼 환자와 의사 사이의 신뢰가 중요하게 자리매김이 된 시대가 된 것입니다.”

이성근 원장은 자리가 끝날 즈음에 회고를 한다. “경영하는 회사가 정상화 되고 3년 동안 흑자가 나고 있을 즈음 회식 자리에서 어느 누군가가 처음 회사가 부도를 맞고 해결해야 하는 2007년으로 다시 돌아간다면 도전을 하겠습니까? 아니면 피하겠습니까? 라고 물었을 때 저는 기꺼이 다시 그런 상황이 온다고 해도 결코 피하지 않고 도전을 위해 몸을 던질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일을 겪고 나서 제 자신이 스스로가 커지고 자랐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만약에 그냥 의사로서 풍요로운 삶만을 영위해 갔다면 고만 고만한 사람으로 살았겠지만 거대한 태풍과 같은 시련을 겪고 해결하는 과정에서 세상을 다르게 볼 수 있는 풍성한 인생을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어떤 시련이 다시 온다고 하더라도 피할 생각은 전혀 없습니다.

결국은 시련이 사람을 만들어낸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결핍이 동기를 만들어냅니다. 시련과 결핍을 결코 나쁘게만 보지는 않습니다. 특히 젊은 시절에서 시련과 결핍이 왔을 때 인생의 역전드라마를 펼 수 있다고 생각을 합니다.

청소년 시절에 결핍이 있는 사람이 성장을 하면서 자기 사업을 일구어서 큰 성공을 거둔 사람을 보았으며 어려서 부유하게 자란 사람들 중에 삶속에 동기부여를 받지 못한 사람은 부모의 음덕이 끝나버린 사십대에는 힘없이 꺾어지고 주저앉는 경우를 자주 보았습니다.” 그러면서 이성근 원장은 자신의 인생에 있어서 경험을 담고 있는 특유의 ‘춘.하.추.동 이론’을 펼쳤다. “인생에도 춘하추동이 있습니다.

그리고 절대 순서가 바뀌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인생의 주기는 15년 주기로 보면 되는데 어려서 누린 사람은 나이를 먹으면서 곤란을 겪게 되어 있고 어려서 고생을 한 사람은 나이를 먹으면서 풍요를 누릴 수 있습니다. 인생에서 풍요한 가을을 두 번 누리는 것도 큰 축복입니다.” 춘하추동의 이론을 설명하는 이성근 원장의 모습이 자못 진지하게 느껴지는 것은 그의 삶이 파노라마처럼 스쳐가기 때문일 것이다. 철저하게 ‘환자 중심의 병원’으로 인식되는 한국의 ‘메이요 클리닉’으로 성장하는 ‘이샘 병원’과 어느 누구도 감히 흉내 낼 수 없는 드라마 같은 삶이 ‘사람을 살려내는 의술과 기업을 살려내는 인술’로 온 누리를 밝게 비추고 아름답게 성장하는 모습을 지켜보는 영광을 함께 할 수 있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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